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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Aug 17.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오 피녜랄 22

프리모티보길을 들어선 처음 며 칠 동안 혼자 걷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로드리게스 아저씨와 하루 종일 얘기를 했는데 다시 홀로서기를 할 시간이다. 갈 길이 멀어 일출 전에 출발했다. 검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뿌듯했다. 아침부터 고속도로 길이다. 고속도로 난간에 그려진 노란색 화살표를 쭉 따라갔다. 

고속도로 중간에서 길을 꺾어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길로 가라고 화살표가 말했다.

- 싫어!!

까미노에서 혼자 걸을 때는 욕을 많이 했다. 평생 한 욕을 다 합쳐도 이번 여행에서 한 욕이 더 많을 것이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니 멀리 8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뒤따라오고 계셨다. 할아버지보다 뒤쳐질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겨 멈추지 않고 계속 등산을 했다. 나는 숨이 가빠서 헉헉대는데 할아버지와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곡선을 돌면서 나무 그림자에서 잠깐 쉬는데 할아버지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저벅저벅 발소리만 내며 나를 앞지르셨다. 누가 뭉게 구름 3조각을 오려 할아버지 얼굴에 붙였는지 양쪽 귀 옆, 코 아래가 새하앴다. 긴팔 긴바지를 입은 나와 달리 반팔과 반바지를 입으셨는데 나보다 척추가 곧고 몸이 근육으로 탄탄해보였다. 할아버지는 여기 갈리시아 지역은 조개껍데기 모양과 화살표 방향이 북쪽길을 시작했던 아스투리아스 지역과 반대 방향이니 잘 구분하라고 알려주셨다.

- 이 새끼들이 화살표 방향에 일관성도 없고 말이야!!

다행히 갈리는 길이 거의 없어 중간 마을까지 잘 도착했다. 빵집을 갈까, 마트를 갈까, 바를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 니키! 

로드리게스 아저씨가 바에서 나를 부르셨다. 거의 목표 장소에 다 왔다면서 맥주 한 잔을 같이 먹자고 했다. 

- 너는 오늘 어디까지 갈꺼니?

- 저는 아저씨가 가시는 동네 다음 동네까지 갈까해요.

- 여기는 산마을이라 다음 동네는 24km 더 가야 하는데?

- 그래도 하루 걷는 거리가 23km면 너무 짧잖아요.

로드리게스 아저씨는 바 주인에게 일정에 대해 물어본 듯했다. 주인 아저씨는 큰 눈을 더 크게 뜨시더니 손사래를 치며 뭐라고 말씀하셨다.


- 여기 주인도 하루에 47km 걷는 건 무리라고 하는데? 

- 23km만 걷는 건 너무 게으른 거예요!

- 부지런히 걸어서 뭐 할꺼니!

- 제 인생이 계획보다 10년이나 늦었다구요! 빨리 가야 해요!

- 디오스 미오(Dios mio)! 신이여, 얘 좀 어떻게 해주세요!

로드리게스 아저씨는 정신 차리라는 듯 두 손으로 내 몸을 흔드는 시늉을 했다. 

아저씨와 1시간 쯤 더 걸어 도착한 알베르게는 꽤 크고 깔끔했다. 가장 좋았던 점은 2층 벙커 한 세트마다 벽과 커텐이 설치되어 2인실이라는 점이다. 운이 좋아 한 명이 더 오지 않으면 나만의 1인실이 된다. 주인이 일단 한 방에 한 명씩 배정해줬고, 공실도 많았기 떄문에 내 방으로는 더 이상 사람이 오지 않을 수 있었다. 

샤워를 하고 알베르게와 함께 운영되는 식당에 내려갔다. 식당 옆 테라스에 식탁과 의자가 있어 와인 한 잔을 들고 앉았다.

- 여기 앉아도 되니?

중동사람으로 보이는 남자와 유럽사람으로 보이는 남자 3명이 합석했다.

- 너희들은 어디서 왔니?

- 나는 이집트에서 왔고, 얘는 캐나다, 얘는 독일에서 왔어.

- 얘는 영국에서 평생을 살았으면서 맨날 이집트 사람이래. 웃긴 자식. 하하하.

- 이집트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더 주더라고 하하하. 

셋은 까미노를 하면서 만났고, 걷는 속도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대화도 재밌어  일주일 동안 함께 다녔다고 했다. 나도 함께 다닐 수 있었는데 내가 먼저 떠나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을 모이짜 아주머니 생각이 잠깐 났다.

- 내 이름은 후세인이야. 얘는 라이너, 예는 펠릭스야.

이집트 태생 영국 사람 후세인은 출신국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캐나다인, 독일인에 비해 흥미로웠다.

- 후세인, 너는 무슨 일을 하니?

- 나는 주중에는 엔지니어고 주말에는 요가 강사야.

- 남자 요가 강사가 흔치 않은데.

- 맞아. 그래서 인기가 더 많아. 하하하.

- 나도 요가 강사 되고 싶었는데! 어떻게 하게 됐어?

- 처음에는 그냥 배우기만 했었는데 하다 보니 좋아서 강사까지 됐어. 너두 하고 싶으면 해봐. 정말 좋아!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잘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고 좋아하는 일을 두 번째 부업으로 삼을 수 있었다.

- 북쪽길에서 프리모티보로 왔다고? 까미노 해보니까 어때?

- 온 발에 물집이 잡혀서 너무 아파서 하려고 했던 생각 정리를 많이 못했어.

- 생각 안하는 게 좋은건데.

- 나는 생각하려고 왔는데.

- 그건 이미 한국에서도 많이 하잖아. 하하하. 여기에서라도 오직 여기에 깨어있는 게 중요해.

- 나도 깨어있으려고 해. 너는 어떤 방법을 쓰니?

- 나는 특히 호흡에 집중해. 그리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향기나는 것, 손끝에 느껴지는 것, 발에 닿는 것 모든 감각에 집중해.

- 나는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계획하려고 까미노에 온거야. 어떻게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방법을 찾으려고 온거야. 근데 몸이 너무 아파서 까미노를 제대로 못한 것같아.

- 몸의 감각을 느끼는 게 현재에 깨어있는거야. 너가 까미노를 제일 잘 했네! 하하하. 

- 난 깨닫고 싶은데 아프기만 하고 깨달은 게 없어.

- 깨닫는다는 건 영화에서처럼 책상을 탁 치고, 눈을 번쩍 뜨고, 그런 한 순간이 아니야. 계속 매 순간마다 호흡과 감각에 깨어있는거야. 너 지금 집중하고 있어?

- 응

- 너 이 사람들 보여? 새 소리 들려? 나무 향기 맡고 있어? 와인 맛보고 있어? 손끝에 이 테이블이 느껴져?

- 응

- 그럼 너는 지금 깨어있는거야. 지금 깨닫고 있는거야. 과거는 존재하지 않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 오직 현재만 있어. 생각하는 건 깨닫는 게 아니야.

- 나는 충동적으로 여기 왔어. 인생을 바꿀 방법을 깨닫고 싶어서. 근데 출발할 때나, 지금이나, 여행이 끝나면 원하는대로 인생이 변할까? 변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되는거야.

- 넌 이미 변하는 중이야. 생각이 그걸 모를 뿐이야. 생각을 멈춰. 생각한테 주도권을 주지 마. 충동이라고 했는데 충동과 직관은 다른거야. 너는 어디선가 까미노에 대해 들었겠지. 그리고 계속 마음에 두다가 여기에 온거야. 마음 속에 뭔가 움직여서 여기 온거야. 그래서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배낭을 챙긴거지. 그건 생각한 게 아니라 계획한 거야. 생각과 계획을 구분해야 해.

- 항상 이성이 감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왜 감각에 깨어있는 게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해?

- 이성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누가 그러니?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 몸과 마음이 반응을 해. 그게 신호야. 뭘 하려고 하는데 몸과 마음이 저항을 해. 그러면 그건 네 길이 아닌거야.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해. 근데 생각이 많으면 이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명상을 하면서 생각을 비우면, 다시 말해 현재에 집중하면, 답은 마음 속에서 저절로 떠올라. 근데 사람들은 생각을 너무 많이해. 진짜 지나쳐. 여기 컵을 봐봐. 꽉 차있으면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어. 컵을 비워야 해. 그래야 다이아든 루비든 중요한 걸로 채울 수 있을꺼 아냐. 깨어있는 순간이 깨닫는 순간이야. 현재에 집중하고 있지 않으면 자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야. 내일을 걱정하지 마. 오늘, 지금 집중하면 내일 일은 저절로 풀려.

명색이 동양인 불교 신자가 서양인 스님 법문을 듣고 있는건가 생각이 들 찰나, 옆에서 캐나다인 라이너가 독일인 펠릭스와 어딜 갔다 돌아와서 대화에 참여했다.

- 그 말 성경에도 있어. 잠깐만 검색해볼게. 여기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므로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어떤 종교든 내일은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씩 고를 수 있는 순례자 메뉴를 후세인, 라이너, 펠릭스, 로드리게스 아저씨와 함께 다섯 명이 모든 종류를 시켜 다양하고 푸짐하게 먹었다. 

애피타이저: 갈리시아풍 수프, 해산물 볶음밥, 식초 홍합찜

메인: 바베큐, 생선구이, 돼지 뺨

디저트: 플란(커스터드), 딸기, 푸딩, 요거트

갈리시아 지역 음식은 북쪽길을 시작한 아스투리아스 지역 음식과 달리 해산물이 더 많았다. 돼지 뺨은 차마 맛을 보지 못했다.

식사가 끝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2층 침대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늘밤은 까미노에서 한 번도 갖지 못했던 나만의 방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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