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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Aug 11.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카스트로 21

비몽사몽으로 알베르게를 나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도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잘지 모르겠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응하는 순발력과 생존력을 키우기 위해 나를 극한으로 몰아넣어보고 싶었다. 즉흥에 가깝게 떠난 여행이라 준비를 많이 할 수 없었는데 정말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들은 약 한 달 간 묵을 알베르게를 모두 예약하고 떠난다. 나는 북쪽길로 계속 갈 것인지, 중간에 프리모티보길로 들어설지 길도 정하지 않았다. 까미노든 인생이든 계획에 따라 착착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하겠다 생각되면서도 삶을 잘 느끼는지 궁금해진다. 까미노 여행 이전에는 모든 여행은 꼼꼼히 계획했다. 방문 도시, 방문 시설, 동선, 이동 수단, 숙박 시설, 심지어 식당까지 알아봤다. 효율적인 여행을 계획하니 3일에 할 일을 1일에 다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여행을 즐긴다기보다 벽돌깨기 미션을 수행하는 것에 가까웠다. 여행으로 재충전한다기보다 여행 끝나고 재충전할 시간이 따로 필요했다. 남들 가는 곳을 다 가도 큰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들 가는 곳을 다 가지 않으면 무능력함을 느꼈다.

산 속이 쌀쌀해 잠이 깼다. 어스름한 하늘에 안개가 앞 길을 뿌옇게 만들었다. 안개 끝에 검은 그림자라도 보이면 좀비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 것같았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뒤돌아보니 키가 190cm는 될 것같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 부엔 까미노!

- 부엔 까미노!

언제 내 뒤에 있었냐는 듯 그 큰 키와 긴 다리로 저 앞까지 휘적휘적 걸어갔다. 좀비를 헤치우러 가는 발걸음이다.

서글픈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어제 오르막길을 걸은 건 오늘 장경을 보기 위한 것이다. 사파이어처럼, 보이는 각도에 따라 하늘이 진하게, 연하게, 파랗게 빛난다. 아래 뾰족뾰족 난 침엽수 그림자는 하늘을 받치고 있어 마치 사파이어 반지같다. 얼마나 높이 올라왔을까. 구름은 저 아래 깔려있다.  전체적인 모습이 하얀 쿠션 위에 있는 사파이어 반지같다.

사파이어 반지를 선물받은 것같은 기쁨을 느낄 때 누군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 안녕!

- 안녕하세요!

- 어제 내 옆 벙커에 있지 않았니?

- 아 그랬나요?

- 그랬을거야. 네 옆에 사람이 코를 골았어. 난 무슨 증기 기관차가 지나가는 줄 알았어. 하하하.

- 진짜 저도 깜짝 놀랐어요.

로드리게스 아저씨는 50대로 보이는 스페인 사람인데 지난 해 프랑스길로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까지 갔다고 한다.

- 근데 그 가방 편하니?

- 불편해요. 쇄골, 어깨가 아파요. 처음에는 심장 마비인줄 알았어요. 버릴 물건도 없어서 그냥 다 들고 다녀요.

- 무게도 중요하긴한데 가방이랑 몸이랑 너무 떨어져 있어. 가방이 등에 착 밀착되어 있어야 해. 거북이 등껍질처럼 착. 배낭 내려볼래?

로드리게스 아저씨는 배낭에 있는 어깨끈과 가슴끈을 착 줄였다.

- 어때? 이제 좀 괜찮니?

- 까미노 한지 3주가 지났는데 이제야 제대로 가방을 메네요. 허무하게. 하하하.

- 까미노는 좀 어때? 

-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하하하.

- 왜?

- 너무 힘들어요. 처음에는 체력적으로 힘들었어요. 그래도 항상 동행하는 까미노 아미고가 있어서 버텼어요. 근데 프리모티보길에 들어서고 나서는 거의 저 혼자 걸었어요. 이제는 정신적으로까지 힘들어요.

- 첫 까미노인데 산티아고 가는 길 중이세 가장 힘든 길을 선택했구나. 제일 예쁘지만 제일 힘든 프리모티보길을 했으니 이제 다른 길로 까미노를 하면 더 쉬울거다. 하하하.

- 너무 고생을 해서 다시 까미노 생각이 날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그냥 하루 30km 이상 채워서 산티아고 입성하는 생각만 해요.

- 나는 산티아고 도착하는 거 별로 신경쓰이지 않아. 오히려 가는 게 싫어.

- 왜요?

- 오면서 “길은 산티아고가 아니라 길에 있다(Camino is the way, not Santiago)”라는 말 많이 들어보지 않았니?

- 비슷한 말 많이 들었어요. “목적은 킬로미터 수가 아니라 길에 있다(The way is the goal, not the km)", “까미노는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 관한 것이다(Camino is about the journey, not the destination)” 라는 말도 있었어요. 좋은 말이긴 한데 사실 와닿지 않아요. 평생 살면서 들어온 게 “성과를 내라", “끝이 좋으면 다 좋다", “결과가 중요하다" 이런 말이니까 지금까지 배웠던 것과 반대 개념이잖아요.

-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기 온 거 아니니? 하하하.

- 그렇긴 하죠.

- 나는 그냥 걷는 것 자체가 좋아서 까미노를 해.

- 왜 두 번이나 하세요?

- 일단 걸으면서 인생을 반추할 수 있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고. 그런데 제일 재밌는 건 이렇게 길을 걸으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거야. 너처럼 말이다. 하하하! 까미노 표지판에 “유럽문화여행(Itinerario Cultural Europeo)”이라고 봤니? 나는 그 말이 좋아. 하루 치를 걷고 나서 따뜻한 샤워하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키면 캬! 신이 있다는 걸 느껴. 그리고 다른 까미노 아미고들과 얘기하지. 주로 유럽 사람들인데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어. 보통 혼자 걷고 걷기가 끝나면 사람들과 어울려.

그 때 한 여성이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다가왔다.

- 저 어머니 진짜 대단한 여성이야. 리투아니아에서 왔는데 7살 딸, 9살 아들을 데리고 셋이 까미노를 하고 있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스쿨링을 하고 여행을 다닌데. 학교에 다니는 애들보다 더 큰 인물이 될 것 같지 않니? 

- 진짜 그럴 것같아요. 다른 아이들처럼 교과서가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접하잖아요. 여러 사람들 만나면서 다양한 국가와 언어도 배우고. 음식, 문화도 배우겠네요. 역사, 지리에 대한 호기심과 학구열이 저절로 생길 것같아요.

이어 거대한 댐이 보였다. 수력발전소가 있는 살리메 댐이였다. 하늘과 산이 살리메 댐에 비쳐 위 아래로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었다. 로드리게스 아저씨와 나는 차도 오른쪽 갓길을 따라 다시 오르막을 걸었다. 

- 아저씨는 30대로 돌아가면 무엇을 바꾸고 싶으세요?

- 덜 두렵고 슬프게 살고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 꺼다. 하하하.

-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쉽지 않은 것같아요.

- 아버지가 6살에 돌아가셨어. 그 때 큰 충격이었어. 이후 직장, 가족, 친구를 잃는 것에 대해 항상 두려움이 있었어. 수 십 년이 흘러서야 깨달았는데 두려워하는 일의 99%는 일어나지 않더라. 걱정, 두려움은 다 공상이야. 그걸 알면 더 즐겁게 감사하며 살 수 있어. 내가 운동을 하다가 아킬레스 건이 끊어져서 수술을 3번 했어. 뛰지는 못하는데 자전거나 하이킹은 의사가 괜찮다고 하더라. 평생 스포츠를 종류별로 다 해본것 같은데 하이킹이 제일 좋더라.

일부 까미노 아미고들이 숙박하는 폴라 데 아얀데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이었는데 현지 스페인 사람과 동행을 하니 웬지 맛있는 것을 먹을 것같은 느낌이었다.

- 먹고 싶은 게 있니?

- 현지 음식이요!

- 여기 또띠야, 바게트, 맥주 2개씩 주세요!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외국인이 반가웠는지 현지인이 반가웠는지 시키지도 않은 하몽과 치즈를 내어주셨다.

- 너는 왜 까미노를 하니?

- 다르게 살고 싶어서요.

- 까미노가 네 인생을 바꿔줄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은 줄 수 있을 것같다. 예컨데 누구와 결혼하느냐 이런 거.

- 아저씨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어요?

- 나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결정했어.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결혼하기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더라고. 그래서 헤어졌어. 정말 힘든 결정이었어. 그러다 정말 사랑하는 지금 아내를 만났어. 말하고 보니 지금 정말 보고 싶네. 너무 보고 싶어서 까미노 도중에 가고 싶을 정도야.

- 부인의 어떤 점을 사랑했어요?

-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니. 하하하. 첫 눈에 반했어. 보자마자 정말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어. 아내는 자궁에 문제가 있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나는 가지고 싶었는데... 그래도 아내 하나 만으로도 정말 행복해. 내 인생에서 일어난 최고의 일이야. 흐억… 주책맞게 눈물이 나오네. 애를 갖고 싶어서 결혼하면 안되지. 그건 사랑이 아니지.

- 맞아요. 제 주변에도 애를 갖고 싶어서 결혼하는 남자, 여자가 있어요.

- 그건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는거지. 결혼은 사랑해서 해야지.

- 아저씨한테는 사랑이 뭐예요?

-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표현하기도 힘들다. 나에게는 내 인생까지 바칠 수 있을만큼 주고 싶은 감정이야. 사랑은 주는거야. 받는 게 아니야.

- 아저씨가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많아도 괜찮아요?

- 사랑은 거래가 아니야. 어떻게 사랑을 계산하니?

- 아저씨가 부인한테 5번 연락할 때 부인이 1번 연락하면 아저씨는 섭섭하지 않아요? 사랑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게 좋은 것같아요.

- 사랑을 주로 받기만 했나보구나.

- 남자친구가 결혼하자고 했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랑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여기 와서 친구들은 생각이 나는데 남자친구는 별로 생각이 나지 않아요.

- 사랑하면 보고 싶고, 주고 싶은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너가 사랑하지 않는 것같다. 사랑하지 않는데 결혼하면 안돼.

- 사랑받아서 결혼하면 안돼요?

- 아냐. 결국 넌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테고 그럼 결국 네 남자친구도 불행하고 너도 불행해.

- 지금 남자친구랑 헤어지면 이만큼 사랑받지 못할 것같아요. 심지어 남자친구도 “너를 나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 못만날껄" 이랬어요.

- 네 나이가 몇인데! 내가 장담하건데 너를 그만큼 아니 그 이상 사랑하는 사람 분명히 만난다. 하하하.

-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 오래 살아서 알아.

- 남자친구와 헤어졌는데 저는 사랑하지만 저를 덜 사랑해주는 사람과 만나면요?

-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너가 사랑하잖니. 사랑은 균형과 합의를 이루는거야.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났듯이 너도 그런 사람을 만날꺼다. 하하하.

로드리게즈 아저씨는 갑자기 아내가 보고싶다며 영상통화를 걸었다. 스페인어로 대화하는데 목소리에 사랑이 묻어나왔다. 아저씨가 통화하다 말고 날 바꿔주겠다며 휴대폰을 나에게 돌렸다. 평범하게 생긴 여성이었는데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어서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머니가 마지막에 나를 보고 무슨 말을 외쳤다.

- 아주머니가 뭐라고 하신거예요?

-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거야!”래. 하하하.

- 하하하.

혼자 먹는 식사보다 함께 먹는 식사는 맛있었다. 

- 너 혼자 까미노할 때 기분이 어떠니?

- 슬프고 우울해요.

- 나는 혼자 걸을 때 기분 좋아. 혼자 걸으면서 왜 그렇게 느끼는 걸까 이유를 잘 찾아봐.

- 빨리 걷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요.

- 왜 빨리 걷고 싶어?

- 여행이 제가 생각한 일정보다 늦었어요. 인생 전반적으로 관행적으로 제가 이뤘어야 할 일들이 또래에 비해 늦었어요. 빨리 부모님한테 빚도 갚아야 하고…

- 부모한테 빚을 졌어?

- 부모님한테 받은 게 많아요. 제가 뭔가 마음이 들지 않은 결정을 하면 부모님은 “내가 너한테 투자한 게 얼만데!” 이러세요. 그리고 “너한테 한만큼 내가 투자를 받았으면 충분히 성공했겠다!” 그러세요.

- 자식을 투자 대상으로 보는 건 잘못된 것같다. 아이는 배우자를 사랑해서 생긴 사랑의 결실일뿐이고 결국 성인이 되면 떠나보내는 건데.

- 한국이 효라는 개념이 특수하게 강한가봐요.

- 그럴 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건 자식의 행복이야. 너가 먼저 행복해야 해. 그래야 주변 사람들도 행복해.

부모님은 내 행복이 아니라 성공을 바라는 것같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마을을 지나자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게 머리를 묶었다. 다양한 색깔의 야생화는 바람에 춤추는 것같았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앞뜰에서 여성 두 명이 라틴 음악을 크게 틀고 맨발로 춤을 추고 있었다. 스텝을 밟으며 앞으로 갔다가, 옆으로 갔다가, 한 팔을 올리고 한 바퀴 돌다가, 상대방을 돌렸다. 방금 샤워를 마쳤는지 젖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그 춤은 살사라고 했다. 살사가 저렇게 자유롭고 섹시한 춤이구나. 묶은 머리를 괜히 나도 따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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