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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Aug 19.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카스트로 베르데 23

나만의 방에서 숙면을 하고 일찍 출발했다. 한국에서는 내 방이 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까미노에서는 적게는 2명, 많게는 40명이 한 공간을 나눠써야 했다. 타인을 신경쓰지 않고 작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내 공간이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감사했다.

짐을 가볍게하기 위해 얇은 옷만 갖고 왔는데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해 쌀쌀하다. 안개는 나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일으킨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반면 어떤 이는 불확실하니까 오히려 설렌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든 신이든 믿으니까 결국 다 잘 될 것이라고 한다. 불확실성이라는 같은 상황을 두고 왜 누구는 부정적으로, 누구는 긍정적으로 볼까. 과학적 근거나 경험적 사례가 있어야 믿는 성격 탓에 그런 긍정적 확신이 있는 사람이 의아했다. 그리고 부러웠다. 

까미노를 시작한지 3주가 지났으니 배낭 무게가 익숙해질 법도 한데, 몸에 근육이 붙어 덜 무겁게 느껴질만도 한데, 여전히 쇄골과 어깨가 아팠다. 가슴 위를 지나는 끈이 너무 아파서 끈을 연결하는 버클 아래 손수건을 대야 했다. 


침엽수가 울창한 큰 숲에 들어섰다. 위로 높게 쭉쭉 뻗은 나무를 보면서 내 앞날도 안개가 껴서 보이지 않더라도 결국 쭉쭉 올라가면 좋겠다고 바랐다.

많은 종류의 길을 걸었다. 아스팔트/시멘트길, 진흙길, 흙길, 꽃/풀/해변길이 있다. 아스팔트/시멘트길은 지옥길이다. 그 위에서 계속 걸으면 발바닥에서 불이 난다. 진흙길은 천민이 걷는 길같다. 수백 개의 흙탕물 웅덩이를 피하기 위해  등산스틱으로 균형을 잡느라 채찍 맞으며 육체 노동한 것처럼 힘이 쫙 빠진다. 웅덩이에 빠져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도 있다. 흙길은 평민이 걷는 길같다. 진흙길처럼 고되지는 않지만 중간에 돌부리가 있어 요리조리 잘 피해야 한다. 꽃/풀/해변길은 왕족이 걷는 길같다. 몸무게와 배낭 무게로 무릎과 발바닥에 가중되는 무게가 상당한데 꽃, 풀, 모래는 쿠션처럼 완충 역할을 한다. 마음 맞는 사람과 걷는 길은 길의 종류와 관계 없이 신의 길이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고 대화가 즐겁다면 어깨, 허리, 발의 고통도, 늦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식사 시간까지의 배고픔도, 까미노 이 후 인생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도 잊게 된다. 운이 좋으면 대화하다가 해결책을 찾을 때도 있다.

북쪽길을 걸었던 대다수의 날은, 특히 제일 아름다웠던 구간의 첫 3일은 날씨가 환상적이었다. 프리모티보길을 걷는 동안은 바람, 안개, 부슬비, 심지어 폭우가 내린 날도 있었다. 

오르막은 오르막대로, 내리막은 내리막대로 힘들었다. 산을 오를 때는 어깨가 아팠고, 내릴 때는 무릎이 아팠다. 

혼자 있을 때도 있었고 많게는 50명이 함께 있던 적도 있었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도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까미노가 3주가 넘어가니 조금은 상황에 여여하게 됐다. 아스팔트길을 걸으면 언젠가 풀길도 있겠지. 비가 오는 날이 있으면 해가 뜨는 날도 있겠지. 산을 올라갔으니 내려가겠지. 혼자 있을 때도 있었으니 여럿이도 있겠지. 이제는 일반적으로 좋거나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여건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잘 준비하면 되었다. 바세린이든 파스든, 썬크림이든 우비든, 등산 스틱이든 좋은 배낭이든, 함께 하든 떠나든 내가 현명하게 대응하면 될 것 같았다. 어떤 길이든, 날씨든, 경사든, 사람이든 잘 걸을 수 있을 것같았다.

하지만 이런 순간적인 깨달음을 놓치기 일쑤였다.

진흙탕이 너무 싫다고 비가 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오늘은 숲도 없는 들판에서 뜨거운 태양에 대고 얼굴 타면 어쩔꺼냐고 또 욕을 해댔다. 터벅터벅 자갈길을 혼자 걸을 때였다. 뒤에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로드리게스 아저씨와 반팔, 반바지를 입은 어떤 여성 분과 함께 활기찬 발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 굿데이 메이트! 너는 어디서 왔니?

- 한국에서 왔어요. 호주에서 오셨나봐요?

- 하하하. 응 나는 켈리라고 해.

켈리 아주머니는 셋째 아이까지 대학에 감으로써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며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대학 입학 후에도 부모님과 함께 살았었다. 내가 부모님 집에서 숨이 막혔던 게 아니라 내가 부모님 자유를 박탈했던 게 아닌가 생각했다.

- 내가 이혼하고 연하남을 만나고 있는데, 참고로 내가 60대고 애인은 50대야, 근데 걔가 직장에서 해고될 것 같다고 하길레, 그래서 해고되도 괜찮다, 먼저 퇴사할 수도 있다, 네 사업을 가지면 되지 않겠느냐, 내가 도와줄게, 뭐 그런 얘기를 했지. 우리 더운데 저기서 맥주 마시자!

문장에 마침표가 있는 게 아니라 쉼표로 이어지는 듯한 수다스러운 켈리 아주머니 말에 따라 로드리게스 아저씨와 나는 바에서 맥주를 시켜 테라스에 앉았다.

- 너는 까미노 몇 번째니?

- 저는 처음이에요. 아주머니는요?

- 나는 두 번째인데, 첫 번째 까미노는 완전히 망한게, 산티아고 빨리 가는데 정신이 팔려서 사람들과 대화도 많이 못 하고, 발에 물집도 생기고, 뭔가 느끼지 못해서, 그래서 이 번에는 제대로 하고 싶어서 다시 왔는데, 이번에는 마음을 열고 사람들한테 먼저 말도 걸고, 천천히 걷고 많이 가지도 않고, 피스테라, 묵시아 가서도 며 칠 쉴까 하는데, 살 찌는 거 걱정하지 않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 껏 먹고 있는 게, 스페인 음식이 얼마나 맛있니! 저녁은 또 왜 그렇게 늦게 먹는다니, 하하하. 그래서 지난 번에는 살이 많이 빠졌는데 이번에는 살이 좀 찐 것 같지만, 그래도 그 때보다 더 행복해, 하하하! 

목젖이 보일만큼 터지는 듯한 웃음 소리를 내고, 사진을 찍을 때도 모든 치아가 보일 듯이 활짝 웃는 켈리 아주머니의 긍정적인 에너지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 정도 만남으로도 충분했다. 켈리 아주머니는 이제 그만 걷고 이 동네에서 숙박하겠다고 했다.

로드리게스 아저씨와 나는 다음 동네까지 걸어갔다. 아저씨가 말했다.

- 나는 여기 알베르게에서 머무를건데, 너도 같이 갈래?

나는 다음 마을까지 가고 싶었다.

- 음… 그러죠 뭐…

왜 더 가고 싶다고 말을 못했을까. 내 자신이 싫어졌다.

카스트로 베르데 알베르게에서 20인실 벙커 2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여기는 주방이 널찍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이른 저녁으로 요리할 여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토마토나 크림 파스타를 많이 먹어본 것과 달리 까미노에서는 올리브 오일 파스타를 더 먹었다. 더 담백하고 고소해 나도 오일 펜네 파스타와 와인을 준비해 먹고 있었다. 옆에는 나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남자가 토마토 스파게티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번 까미노 처음으로 한국 사람과 몇 시간 대화를 했다.

- 너는 어디서부터 시작했니?

- 저는 이룬에서 북쪽길 시작했고, 오비에도에서 프리모티보로 다시 시작했어요. 오빠는요?

- 나는 2주쯤 시간이 나서 오비에도에서 프리모티보만 해. 너는 왜 까미노를 하니?

- 인생을 바꾸고 싶어서요. 하하하. 오빠는요?

- 나는 카톨릭이라 종교적 이유 순례길을 걸어. 

- 성당에 가면 의미가 남다르겠네요.

- 아무래도 그렇지.

- 진짜 신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천국이 있을까요?

-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었는데 두 분 다 천국에 있다고 믿어. 그리고 내가 간절히 바라는 일은 대부분 이루어졌는데 그게 나만의 힘으로는 못했던 일들이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어. 그런 일들을 보면 신이 있다고 믿어.

- 인생에서 좋은 일도 있었지만 나쁜 일도 있었을텐데 그 때 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 고통은 선물이야.

- 고통이 선물이라구요?

- 나도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도 많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서 계획을 바꿔야 했고,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면 고통스럽지. 그런데 그게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어. 고통스럽지만 인생의 진리를 배웠으니 고통은 선물이지.

- 저는 제 속도나 거리를 모르고 걷는 바람에 온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몰라요. 한 때는 전혀 걷지 못해서 하루 종일 쉬어야 했어요. 그게 왜 선물이에요?

- 이제는 알았잖아. 네 속도와 거리에 맞게 걸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잖아. 그게 까미노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닐껄? 아마 네 인생에도 적용될꺼야. 그러니까 물집도 결국 선물이지.

- 그거 자기 합리화 아니예요? 고통은 고통이예요.

-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아. 발이 아프지만 그 안에 스토리가 있잖아. 너가 발이 아프고 낫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과, 겪은 경험이 있잖아. 그게 너만의 스토리가 되는거야. 그게 네가 받은 선물이야.

- 제가 받고 싶은 선물은 까미노 끝나고 인생이 바뀌는 거예요. 근데 까미노하면서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까미노 끝나고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걱정돼요.

- 여행도, 인생도 계획대로 되지 않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를 잊지 않으면 크게 봤을 때 계획이 또 유효해. 너가 걸으면서 이런 일, 저런 일 겪었지만 산티아고도, 다음 목적지도 결국 갈꺼잖아. 인생이 계획대로 가지 않고 좌충우돌해도, 그래도 큰 그림에 다다르고 있을거야.

- 어떻게 그걸 확신해요?

- 계획에 없던 상황에 재빨리 대응하면 돼. 예상치 못한 변수를 잘 성찰하고, 주변 사람들 지혜도 빌리고 적절히 대응하면 돼. 그럼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지만, 또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도 아니야.

- 그런 불확실성이 불안하지 않으세요?

- 불안은 행복이야.

- 불안이 행복이라구요?

- 과거의 너와 지금의 너를 봐봐. 지금 상황이 어렸을 때보다 더 복잡하지 않니? 그런데 잘 감당하고 있잖아.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 때문에 불안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네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앞으로 살면서 더 어렵고 복잡한 일들이 생길거야. 그런데 동시에 네가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커질거야. 까미노 하면서 고통의 역치가 더 높아지지 않았니? 앞으로 고통이 더 커질거야. 그런데 그보다 더 큰 행복을 느낄거야.

- 제가 잘 감당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힘들고, 두렵고, 불안하고, 온 몸이 아픈데 까미노를 잘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어요.

- 까미노 몇 번째 하는거니?

- 처음이요.

- 처음하는건데 여기까지 온 거 보면 잘 하고 있어. 여기는 네 집에 있는 게 아니잖아. 집 앞 마트에 가는 것도 아니잖아. 익숙한 곳도 아니고 너가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불안하고 아픈 게 당연히 잘 하고 있다는 증거야. 무엇이든 처음 시도할 때 늘 힘들고 불안하지. 그리고 실수하는 것도 당연하지. 자전거도 처음부터 잘 타는 게 아니잖아. 많이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지. 까진 곳이 또 까이고, 딱지가 생기면서 능숙하게 페달을 밟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 그렇게 자전거 타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온 길을 내달릴 수 있어. 너는 지금 크고 작은 고통을 통해 새로운 것을 몸에 새기고 있는거야. 그리고 그 만큼 온 몸에는 생채기들을 훈장처럼 갖게 되는거지. 그러니까 당연히 낯설고, 두렵고, 걱정되고, 어색하고, 온 몸이 아픈 너는 잘 하고 있는거야. 우리는 지금 집 앞 익숙한 마트를 가는 게 아니야. 까미노라는 수백킬로미터의 미지의 길을 걷고 있는거야.

- 와…

- 너가 행복하길 바래. 나보다 행복하길 바래. 신에게 너의 축복을 기도한다.

“고통은 선물이다, 불안은 행복이다”라고 관점을 바꿔준 오빠의 롤모델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라고 했다. 시간이 깊어가는줄도 모르고 밤 늦게까지 대화를 나눈 오빠는 알고보니 그냥 카톨릭이 아니고 신부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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