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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Oct 12. 2022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 33 (마지막 회)

일찍 알베르게로 돌아온 이유는 아침 일찍 조식을 먹고 포르투 여행 4일차이자 마지막 날 여행지인 기망라이스로 떠나기 위해서다. 기망라이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로 포르투갈의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역사가 보존되었다고 한다. 재밌을까? 어제 두 관광객 제안을 거절할만큼 재밌을까?

구경도 하고 싶지만 사실 그만 걷고 싶었다. 일단 호텔을 찾아야 하는데 방향이 헷갈렸다. 지나가는 할머니께 지도를 보여드리며 길을 물었다.

- 실례합니다. 여기 어떻게 가는지 아실까요?

- 내 눈에 지도가 안보이는데. 일단 이렇게 갔다가 저렇게 갔다. 아니지 요렇게 가는거였었나.

길을 손가락으로 휙휙 가리키는데 더 헷갈렸다.

- 도와드릴까요?

한 청년이 다가왔다. 

- 아 여기구나. 안그래도 지금 그 쪽으로 가는 길이에요. 잘됐네요. 같이 가시죠.

잘 아는 길인지 길이라기보다 상가 통로를 가로질러, 주차장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가는 것같았다. 이 동네에 오래 산 청년인지 몇 미터 지날 때마다 동네 사람들과 정겹게 인사를 나눴다.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어떻게 이렇게 서로 잘 알지?

- 이 작은 도시는 어떻게 알고 여행하는 건가요?

- 포르투에 있다가 여기가 괜찮다고 들었어요.

- 포르투가 더 재밌을텐데. 여긴 조용해요.

- 그래요? 어쨌든 관광객 안내소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동네 청년은 떠났다. 관광객 안내소는 불친절했다. 호텔이 많으니 알아서 찾아보라며 호텔 목록이 적힌 종이 몇 장을 줬다. 아 여기서 어떻게 고르지. 그냥 돌아다니다가 아무데나 들어가는게 낫겠다.

- 잘 찾았어요?

- 응? 왜 다시 왔어요?

- 관광객 안내소도 못찾는데 뭘 제대로 찾겠어요? 하하하.

인사했던 동네 청년이 다시 돌아왔다. 

- 마침 시간이 남았으니 같이 찾아봐요.

- 고마워요. 이름이 뭐예요?

- 리코예요. 근데 왜 그렇게 배낭이 커요? 그건 뭐예요? 와인 세트? 이리 줘요 배낭도 무거울텐데.

- 들어줘서 고마워요. 배낭이 큰 건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기 때문이에요.

- 까미노는 어땠어요?

- 걷는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하하하. 스페인 말고 포르투갈 순례길도 있다고 들었어요. 해봤어요?

- 아니오. 진짜 힘들었겠네요.

- 네. 오늘 마지막 날이라 조금 구경하다 편하게 쉬려구요.

- 마지막 날 기분이 어때요?

- 일단 빨리 배낭을 내리고 싶네요. 하하하.

호텔 몇 군데를 들렸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리코네 집은 어때요?

- 뭐가요?

- 에어비앤비(Airbnb) 같은거에요. 해외 여행하면서 현지 가정집에서 숙박하는거예요. 그러면 여행객은 호텔보다 저렴하니까 좋고, 집 주인은 빈 방에서 수익이 생기니까 좋은거예요.

- 제 집에서 잔다구요?

- 정확히 말하면 방에서 자는거예요. 물론 각자 다른 방에 있는거예요. 딴 생각하지 마시구요.

- 그러니까 제 집에서 잔다는거잖아요.

- 각자 다른 방에서 방 문 잠그고 자는거예요. 싫으면 할 수 없죠. 됐어요. 다른 곳 찾아보죠 뭐.

드디어 한 군데를 찾았다. 아침 7시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역시 기준이 확실하면 선택이 쉬워진다.

- 숙박 문제는 이제 해결됐네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 이제 뭐할거예요?

- 짐 놓고 이제 동네 구경해야죠.

- 어디 가고 싶은데요?

- 여기 무슨 성이랑 성당이 있다고 하던데.

- 아 브라간사 공작 궁전이랑 펜하 성당. 근데 여기서 멀어요. 펜하는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야하고. 제가 차로 데려다줄까요?

- 진짜요? 안바빠요?

- 아 할 일이 있긴 한데 그건 니키 혼자 궁전 구경하는 동안 잠깐 나갔다 처리하고 올게요.

그래서 나는 짐을 두고 리코의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도 리코는 동네 사람들에게 여러 번 인사를 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짐작했다. 리코는 브라간사 공작 궁전으로 날 데려다주고 2시간 후에 오겠다고 했다. 화려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이나 아름다운 독일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가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비교적 간소한 브라간사 궁전에서는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궁전과 성곽을 둘러보고 시간이 남아 만날 장소 근처에 있었는데 마침 길거리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세 명이 클래식 명곡을 연주하고 있어 감상했다. 정시에 오지 않으면 나 혼자 가야지 생각할 찰나, 리코가 정시에 왔다.

- 잘 구경했어요?

- 네. 이제 펜하 성당에 가볼까요?

펜하 성당은 산꼭대기에 있는지 차로 한참을 지그재그로 올라갔다.

- 남자친구 있어요?

- 있긴 한데 결혼하자고 해서 고민 중이예요.

- 하하하. 나랑 똑같네.

- 여자친구 있어요?

- 있긴 한데 결혼하자고 해서 지금 골치가 아파요.

한참 결혼이라는 사회제도에 대해 얘기하고 나서 갑자기 리코가 말했다.

- 나랑 같이 살래요?

- 뭐라구요? 아까는 에어비앤비도 싫다더니 무슨 말이예요. 하하하.

- 아니 그건 하루 있다가는거잖아요. 동네 사람이 다 볼텐데 뭐라고 수근거리겠어요. 처음 보는 여자가 하룻밤 왔다가 사라졌다고 누구냐고 할거아녜요.

- 동네 사람들끼리 진짜 친한가봐요. 

- 서로 잘 알죠. 근데 진짜 생각해봐요. 회사도 퇴사했다면서요. 아버지가 의류 공장을 하는데 아마 취업도 시켜줄거예요.

- 하하하. 포르투갈어 하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여기서 살아요.

- 배우면 되죠. 그리고 영어 써도 돼요. 생각해봐요. 한국보다 포르투갈이 더 자유롭잖아요. 거기는 정치적 경제적 자유도 없고.

- 뭐라구요? 지금 북한이랑 남한이랑 헷갈려하는거 아니예요?

- 아닌데. 먼저 포르투갈에 혼자 온 다음에 니키 부모님도 탈출하도록 도와줄게요.

- 하하하. 왜 탈출을 해요. 두 분은 자유로운 한국에서 잘 살고 계세요.

- 지금 독재자한테 세뇌가 되서 그래요. 그럼 일단은 비행기표부터 연기하고 여기 며칠 더 있어봐요. 그리고 나랑 같이 한국 가서 부모님한테 인사드려요.

- 하하하. 인사를 왜 해요. 

- 아니 동거를 하는데 예의상 인사는 해야죠.

- 내가 언제 리코랑 동거한다고 했나요. 하하하.

- 내 친구 하나가 일본인 여자친구랑  동거하다가 애 둘을 낳았는데 지금은 결혼해서 잘 살아요. 애들이 얼마나 이쁘고 똑똑한지. 알죠? 유전자 풀은 다양할수록 좋은거.

- 하하하. 동양 여자에 대한 환상이 있는거예요, 좋은 유전자에 대한 욕심이 있는거예요?

- 그런거 아녜요. 그냥 그런 좋은 점이 있다는거죠. 어쨌든 우리 대화가 잘 통하는거 보니 아마 잘 살 것 같아요.

- 하하하. 드디어 펜하 성당에 왔네요. 진짜 높이 있구나.

성당을 대충 둘러보고 성당 앞에서 리코가 내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다른 관광객이 말을 걸었다.

- 두 분 같이 찍어드릴게요. 옆에 서보세요. 하나, 둘 셋! 둘이 진짜 잘 어울리네요!

얼떨결에 둘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가까이서 옆모습을 보니 리코 속눈썹이 예뻤다. 어느 여자 속눈썹보다 더 풍성하고 길었다. 리코도 나를 그윽하게 쳐다봤다. 

- 와 사진 정말 잘나왔네요. 한번 봐보세요.

리코는 고개를 돌려 내 휴대폰을 건네는 관광객으로부터 폰을 받았다. 리코와 나는 다시 차를 탔다. 한참 지그재그를 내려와 동네 드라이브를 했다. 드라이브하면서 동네를 보니 특별히 볼거리도 없었고  비가 내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배가 조금 고파왔고 호텔 근처 쇼핑몰이 있어 그곳에 있는 식당가로 가자고 했다. 쇼핑몰에는 사람이 많았다.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졸음이 확 몰려왔다.

- 안 먹을래요.

- 안 먹겠다고요?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 네. 근데 마음이 바뀌었어요. 호텔로 갈래요.

- 가겠다고요?

- 네. 좀 피곤하네요. 내일 아침 7시 버스를 타야 하니까 이제 쉬어야죠.

- 아... 그래요. 잘 쉬세요. 저도 이제 가요…

- 네. 오늘 고마웠어요. 잘 가세요…

리코의 제안들이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모르겠다. 여행지 로맨스 기회를 놓쳤을 수도 있고 위험한 상황에서 빠져나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더 똑똑한 반응이 생각날 수도 있다. 리코의 사망 소식에 대해 경찰관이 문을 두드리는 꿈이 나온건 리코에 대한 아쉬움일 수도 있고 두려움일 수도 있다. 예전에는 모르는 사람은 무조건 경계했는데 이제는 반나절 대화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신뢰했다. 작지만 발전이었다. 어쨌든 나는 꿈에서 잠깐 깬 이후 다시 잠들었고 버스를 놓치지 않도록 조식 시간에 맞춰 나왔다. 호텔이 버스터미널과 가까워 제일 빨리 조식 식당에 도착해 여유있게 먹을 수 있었다. 에그타르트 나타(nata)와 종류별 치즈를 마음껏 먹었다. 

포르토 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환승해 인천 공항으로 입국했다. 고맙게도 남자친구가 공항까지 데리러 와 준다고 했다. 부친 짐이 없어 배낭을 매고 빠르게 나올 수 있었다. 입구장 출구가 열렸다. 영화처럼 꽃다발을 주려나? 이름이 쓰인 팻말을 들고 있으려나? 아 공항에 와본 적이 없어 그런 건 모르려나? 

멀리 남자친구가 보였다. 남자친구가 나를 보더니 앞으로 몸을 반으로 접고 미친듯이 웃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 뭐야. 꽃다발은 커녕 안아주지도 않고 왜 폭소를 해.

- 하하하. 니키야. 진짜 너야? 살은 왜 이렇게 많이 빠졌어. 난 또 북한 난민이 입국한 줄 알고. 하하하.

- 뭐라고?!

걷느라 힘들어서 살이 빠져 옷이 많이 헐렁해지긴 했지만 북한 난민이라니. 한 달 넘게 해외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만났는데. 그 중 하나는 내가 진짜 북한 사람인줄 알고 망명을 도와주겠다며 동거 제안까지 했는데. 참 섭섭했다.

- 가자. 맛있는 거 다 사줄게! 국경선 탈출하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 북한 떠나 남한으로 와서 뭐 하고 싶었어? 다 하자! 하하하.

낯선 것도 익숙한 것도 나름대로 좋고 싫었다. 아니 좋고 싫음이 없었다. 상황이 어떻든 내 인생의 주체가 나라는 것만 기억하면 됐다.

- 뭐 먹고 싶어? 아 내가 알아서 선택해주는 거 좋아했지? 한 달 넘게 떨어져 있어서 깜빡했네.

- 아냐. 메뉴 내가 고를게. 먹고 싶은 게 있어.

- 진짜? 한 달 사이에 변한거야?

변했을까. 출국할 때 간절했던대로 두려움, 후회, 자기비하를 버리고 자유, 독립심, 자신감을 갖게됐을까. 남들은 이 것을 이루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갈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필요했나보다. 그리고 당분간은 순례길에 다시 갈 필요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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