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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Apr 06. 2023

[설레는 시 필사] 15. 키스, 장석주

키스


내 농업의 성장세는 실로 괄목할 만해요. 오늘의 특용작물은 키스예요. 당신은 구름과 비의 일을 모르고 서리와 얼음의 때를 모릅니다. 누가 하늘에 청명과 곡우를, 땅에게 파종과 수확의 때를 가르칠까요. 농장에는 향기로운 입술이 백화제방으로 피어나요. 키스에 무지몽매한 사람도 늘었어요. 우리가 키스를 알았더라면 덜 불행했겠지요. 제분소에서 일한 적이 없어도 제분소 집 딸을 만나 키스를 하는 게 사람입니다. 인생은 심오하고 사랑의 일은 그보다 조금 더 하염없는 일이지요. 제분소 일을 모르면서 제분소 집 딸과 키스를 할 때 인생은 유쾌해져요. 우리는 키스를 모르는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 혹은 우리는 키스를 모르는 나라에서 온 야만인들입니다.


고양이와 양치류를 함께 기르는 이의 키스는 천진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키스는 아주 오래된 죄예요. 열 번의 죄, 백 번의 죄, 천 번의 죄. 첫 키스 때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불타는 듯해서 놀랐어요.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키스가 있습니다. 얼음, 잿빛 구름, 검은 커피, 분홍 덩굴장미꽃, 유월의 빗방울, 영국식 브렉퍼스트, 화산의 분출, 가벼운 뇌진탕, 죽음…… 키스, 키스, 키스들. 참전 용사의 키스, 숙녀의 키스, 죽은 영웅의 키스, 아기가 태어난 새벽의 키스, 외딴 집에서 외로운 이와의 키스, 국화꽃 위 벌처럼 잉잉대는 키스…… 이 키스를 탐하는 나는 누구일까요? 아아, 나는 내가 아는 바로 그 사람일까요?


첫 키스는 진흙과 햇빛과 장미의 맛. 키스가 우연한 무중력의 일임을 알았더라면 인생에서 모호함과 회의가 얕아졌겠지요. 어떤 키스는 인생을 쓰디쓰게 만들고, 어떤 키스는 참혹한 기쁨을 줍니다. 우리는 골목, 나무의자, 거실 소파, 풀밭, 강가, 벚꽃나무 아래, 기차에서 키스를 해요. 우리는 키스가 남용되는 오늘의 사태를 우려합니다. 이 나라가 키스의 젖과 꿀이 흐르는 민주주의의 땅이 되려면 키스 허가제와 키스 총량제가 필요하겠지만요. 모든 실패한 자들, 외로운 자들, 우울증을 앓는 자들, 가난뱅이들, 주정꾼에게도 키스는 허락해야 합니다. 키스는 식은 재를 위한 불꽃, 낙화하는 꽃잎에 비치는 마지막 빛, 상심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파도의 기쁨입니다. 키스의 오남용을 막는다고 키스의 유구한 역사가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아들과 딸에게 키스의 덕과 악을, 키스의 교양과 보람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 어느 종교에도 다 있는 친절로 현실의 혐오와 차별, 폭력을 줄일 수 있을까.

**  지하철 옆에 앉은 여성이 감기가 걸린 듯 코를 훌쩍였다. 마스크를 썼지만 불쾌한 마음에 자리를 옮길까 생각했다. 조금 후 그 여성이 손을 눈가로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감기가 아니라 눈물 때문이었다. 가족이 사망한걸까. 만나던 친구와 이별을 한건가. 자리를 옮길 것이 아니라 휴지를 건네줘야 했다. 나는 휴지가 없었다. 앞으로 휴지를 들고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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