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더 초이스, 이디스 이거

by 카멜레온

변명


아우슈비츠 영화는 보고 위안부 영화는 보지 못했던, 아니 보지 않기로 “선택"했던 이유는 내가 할머님들의 아픔을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아우슈비츠는 한국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아파할 수 있지만 위안부는 한국 역사의 일부라 아픔에 압도될까봐 보지 않기로 “선택"했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작가는 이 아픔을 인정해라고 한다. 그리고 용서해라고 한다. 가해자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가해자의 생각에 내가 동조돼 나를 학대한 “나를” 용서하라고 한다. 얼마 전 위안부 관련 영화를 처음으로 봤다. 이제 조금씩 역사를 볼 용기를 내고 있다. 한국 역사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역사도 동시에 직시해야 한다.


아우슈비츠


헝가리 유대인인 작가는 1944년, 16살에 아버지, 어머니, 언니와 함께 가축용 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유대인들은 남성과 여성, 14-40살 사이와 그 외 나이로 분류됐다. 긴 줄을 선 사람들의 운명은 나치의 손가락 끝에서 갈라졌다. 나치가 물었다. “이 분이 네 어머니니 언니니?” “엄마요" 작가는 이 한 마디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자책하며 살았다. 그 한마디에 나치는 작가의 어머니를 왼쪽 줄로 가라고 가리켰다. 죽음의 가스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반면 자신과 언니는 오른쪽 줄, 생명의 길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하지만 살아도 현실은 혹독했다. 소지품은 압수당하고 머리카락은 잘렸다. 추운 겨울에 얇은 옷, 식사로 하루 한끼 수프가 배급됐다. 사람들은 굶주림, 질병 그리고 학대에 죽어갔다. 그래봤자 위안부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작가는 약 1년 동안 강제 노동을 했고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수용소로 ‘죽음의 행진'을 했다. 수용소에서도, 행진 중에도, 행진의 끝에도 사방은 죽음이었다. 작가는 쌓인 시체들 사이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1945년에 미군들이 발견해 생존한다.


치유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는 책 전반부일 뿐이고, 후반부가 남아있다. 작가는 미국으로 가 심리치료사가 되어 전쟁을 겪은 군인이나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 등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을 도와준다. “어떻게 트라우마를 극복했어요?” 라는 질문에 작가는 “극복하지 않았어요. 아직 함께 살아요. 과거는 인정하되 미래를 향해 살고 있어요”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당한 일은 물론 자신이 기여한 일에도 남을 탓하고 복수를 꿈꾸고 분노한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인생에 책임져야 하다고 한다. 책임진다는 것이란 남을 탓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복수를 꿈꾸지 않고 내 꿈을 위해 나아가고, 분노하지 않고 이 삶에서 기쁨을 찾아라고 한다. 작가는 심리치료사로서 여러 사례를 소개한다. 거식증을 앓는 소녀, 서로 비난하는 부부, 자학이 심한 여성, 가족에게 폭력적인 아버지 등을 만난다. 모든 심리치료가 그렇듯이 문제로 보이는 행동은 증상일 뿐이다. 거식증을 앓는 소녀 뒤에는 지나치게 통제적인 부모가 있었고, 서로 비난하는 부부는 아들의 자살 이후 본인들이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자학하는 여성은 과거에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그리고 여행 도중에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가족에게 폭력적인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에서 자기 부하들이 많이 죽은 사건이 있었다.


용서와 선택


작가는 과거에 내가 한일, 당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의 삶을 향해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인과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 사건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비록 부모님이 통제가 심하지만 내가 그에 동조되어 선택을 포기했던 나를 “용서"하고 내가 즐거운 일을 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아들이 자살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자책했던 자신들을 “용서"하고 부부는 죽은 아들이 아닌 살아있는 자신들이 잘 사는데 신경쓰도록 “선택"할 수 있다. 과거에 남들은 내 몸을 성욕의 수단으로 삼았지만 나 또한 가해자처럼 내 몸을 하찮게 여겼던 나를 “용서"하고 앞으로 춤을 추며 기쁨을 몸으로 표현하고, 운동을 하며 내가 내 몸을 소중히하도록 “선택"할 수 있다. 내가 부하들을 살릴 수 없었지만 그런 나를 “용서”하고 가족에게 폭력적이지 않는 방법으로 가족을 지키기로 “선택"할 수 있다.


자유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던 날, 작가의 어머니는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하지만 네 머리 속에 있는 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 작가는 거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 국가는 물론 가족, 친구, 아름다운 나이까지도. 하지만 작가는 정신만은 빼앗기지 않았다. 작가는 남 탓을 하는 것,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것이라고 한다. 가해자의 말을 무의식적으로 믿었던 나를 “용서"하고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 행동하는 “선택"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감옥에서 나가는 열쇠는 우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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