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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cobalt Jul 24. 2023

쉼을 주는 공간

한옥 예찬

결혼기념일에는 남편과 단둘이 외박을 한다. 삼 남매를 키우는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한 1박 2일이다. 멀리 여행을 가는 것은 아직은 마음이 안 놓여서 집에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숙소를 정한다. 매번 북촌 한옥마을의 한옥에서 결혼기념일을 지냈고, 그때마다 특별하고 고요한 쉼을 누리고 왔다.  

취운정

한옥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어지러운 현대 세상과는 떨어진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한옥이 주는 시각, 청각, 후각적 경험이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마음속 깊이 추억하는 할머니 댁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한다.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그윽하고 깊어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방에 들어가면 창문으로 푸른 자연과 새소리가 공간을 고요하게 감싼다. tv도 없고, 살랑살랑 자연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나의 목소리도 나긋나긋 해지고, 더 여유로워져서 부부사이에 여유롭고 부드러운 대화를 하게 된다. 외부적인 자극이 없기에 모처럼 고요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낸 뒤 잠에 들면 오래간만에 숙면을 취한다.


매번 이렇게 북촌 한옥마을 숙소에서 특별하게 조용한 결혼기념일을 보내왔는데 이번에는 십 주년을 맞아 호캉스에 다녀왔다. 북한산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자연친화적' 5성급 호텔. 호캉스는 매우 오랜만이라 내심 기대를 했다. 그리고 그 호텔의 부대시설을 모두 이용하고 싶은 욕심도 생겨서인지 체크인 후 곧바로 야외 수영장, 실내 수영장, 자쿠지, 등을 이용하느라 집에 있을 때 보다도 더 바쁘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성수기에 모인 사람들 틈에서 남편에 집중하기보다는 자꾸 주변을 둘러보게 됐다.


이미 에너지를 털린 채 객실에 돌아왔더니 침대 앞에 최신형 tv앞에서 먹는 치킨이 최선의 선택임이 틀림없다. 한옥에서 노닥거리다 삼청동을 산책하며 숨겨진 식당을 찾아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먹는 저녁식사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공간이 지시하는 행동양식을 거스를 의지는 없었다.


남편은 인디애나 존스를 틀었고 그렇게 치킨을 먹으며 튼 인디애나 존스를 우리는 3편까지 끝을 내고야 잠이 들었다. 잠자는 중에도 나는 인디애나처럼 무언가를 찾고 누군가에게 쫓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머리가 띵한 채로 일어나 보니 이미 조식시간은 지나 있었다. 호캉스의 꽃 조식을 놓친 채 허기진채로 허겁지겁 그렇게 가방을 싸서 쫓겨나듯이 나왔다.


체크아웃을 하며 생각했다. 할 일이 정해진 곳에서의 호캉스를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호텔에 쉬러 간다"는데, 호텔에서 쉬는 쉼이 진정한 쉼인지도 모르겠다. 매일이 고단한 삶 속에서 tv 앞에서 치킨을 뜯으라고 세팅되어 있는 공간에서는,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혼 10주년을 나중에 떠올린다면, 인디애나 존스만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남편의 목소리를 울림 있게 듣고, 서로 분주해서 잘 보지도 못하는 남편의 얼굴을 나의 눈에 한가득 담고 오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그 정도로 삼 남매와 함께 하는 일상은 바쁘고 그만큼 결혼기념일의 하루는 소중한데 말이다. 그래도 재미있는 하루를 보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나에게 맞지 않는 휴가를 보낼 방식을 걸러낼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고 나서야 50만 원의 숙박비를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락고재

 '호캉스'를 하고 와서야, 지금까지의 한옥에서 보낸 결혼기념일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특별함을 공간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도. 북촌에는 한옥을 개조하거나 '한옥처럼' 신축한 숙소도 있지만 가능한 가장 오래된 한옥에 머무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세월의 흔적, 오래된 나무, 빛바랜 서까래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한옥 스테이를 하며 처음 알았다. 몇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에어비앤비 숙소들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정취를 온몸 가득히 담아 올 수 있다.


자연은 한옥의 풍광이 되고 그 풍광은 한옥의 일부분이 되어, 사계절을 품는다. 호텔 창밖에 보이는 북한산 내음을 느끼고 싶었는데, 창문도 열 수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겨울에 뜨끈하게 불을 지펴놓고 눈을 감상했던 때도 기억이 난다. 손을 뻗으면 닿는 눈발을 느끼며 마시는 차 한잔에서 가장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아이들과 함께 갔던 전주 소양고택


 공간에 따라 이렇게 하루가 다른데,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얼마나 다른 삶이 될까를 생각했다. 나의 삶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그것에 맞는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옥에 살 수는 없어도, 의미 있는 하루와 인생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공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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