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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cobalt Oct 12. 2023

영국 소설은 영국에서 읽어야 제 맛

꿈에 그리던 영국에 23세가 되던 해 드디어 가게 되었다. 


10대 내내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메리 셜리 등의 소설을 붙들고 살며 영국은 이상향이자 내면의 고향이 되었다. 10대 때는 누구나 그렇듯이 내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감정들이 올라와 나를 괴롭혔다. 처음 겪어보는 감정들. 그러나 한 발 물러나 가만히 나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도 없었기에 그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던 시절이었다. 영국 작가들은 그 다양하고 요란스러운 감정에 나와 동행해 주었다. 꿈, 성장, 욕망, 성, 죄책감... 나는 그저 누르고 싸매기만 했던 감정들을 펼쳐놓고 그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해 줬다. 영국작가들이 하나하나, 그 어떤 감정도 뭉개버리지 않고 생동감 있게 살려냈기에 나는 거기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녀들의 휘몰아치는 세계 속 어딘가에 나의 들쑥거리는 감정을 놓아두면 나는 안전했다. 그녀들이 펼쳐낸 상상 속이 바로 내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영국은 학창 시절 내내 나의 이상향이었다. 그곳이 정말 내가 속할 수 있는, 내가 안전하게 나의 감정을 풀어내고 명명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 영문학 강의를 들으며 내 손끝까지 전율을 느끼며 존 던부터 T. S. 엘리엇의 시를 공부할 때쯤, 영국에서 1년간 교환학생을 하게 되었다. 


내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는 9월, 이제 막 차디찬 공기가 내려앉은 때였다. 이제부터 날씨가, '내가 영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겠어'라고 결심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손발은 어떻게 꽁꽁 싸매더라도 차디 차고, 파카를 입고 다녀도 스산한 날씨였다. 겨울 옷은 한국에서 이후에 보내주기로 했고, 트렌치코트 몇 개만 가져온 나는 기숙사 방에서도 밖에서도 추워서 벌벌 떨었다. 온도뿐만 아니라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는 날엔 그 음습함이 나의 몸을 침투했다. 게다가 4시경이면 해가 지기 시작해서 기숙사 방에 홀로 갇혀 <암흑의 핵심>, <악마의 시> 같은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영국문학을 읽어야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것이 영국문학이구나. 이 차가운 온도, 어두움, 음습함, 그리고 치명적인 외로움. 내가 십 대 때 읽고 이해한다 느꼈던 브론테 자매의 감정들은 안락하고 편리한 아파트에서 지하철을 발로 삼으며 학교만 다니던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는 것을. 그 글들은 내가 다니던 영국의 대학교처럼, 도시에서 고립돼 있기에 해가 지면 자연의 야생적 시간을 견뎌야 하는 영국 시골마을의 어둡고 축축한 방 안에서 탄생한 글이라는 것도. 


나의 어쭙잖은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영국 작가들의 상상력 안에서 펼쳐 놓았듯이, 영국에 사는 동안 나의 저 밑에 박힌 어두움들을 끄집어내어 거리낌 없이 두르고 다녔다. 밝고 쾌활하고 사교적이지 않아도 괜찮은 곳이었다. 열아홉 살밖에 안된 영국 플랫 메이트들이 자신의 정신과병력을 늘어놓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니까. 긴긴 어둠 속에서 내 안의 어둠을 탐구하던 때. 그 벌벌 떨리던 외로움이 자연스러운 곳. 억지로 괜찮은 척 밝은 척하지 않아도 되는 만연한 어둠. 잘 살지 못해서, 어울리지 못해서, 왕따여서 받은 10대 때의 상처들을 끄집어내어 늘어놓고 나의 내면과 마주하던 그 긴 외로운 밤들이, 가끔은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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