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회고전
여기, 물방울을 그린 작가가 있다. 흘러내리는 물방울, 영롱하게 맺힌 물방울, 번진 물방울, 신문에 맺힌 물방울, 그림자가 드리워진 물방울... 반세기동안 그는 오로지 물방울 만을 그렸다, 그에게 있어 물방울은 무슨 의미일까.
그는 자신의 물방울에 이렇다 할 의미를 말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에게도 김창열의 세계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럼에도 김창열은 물방울을 그리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겼다. 그는 존재 자체로 '물방울 씨'(무슈 구뜨, Monsieur Gouttes)였다. 존재 그 자체가 되어버리면 그 순간부터는 존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존재 그 자체니까.
"그저 그릴 수밖에 없었다"
1929년 평안남도 맨산에서 태어난 김창열은 열다섯에 홀로 월남했다. 6.25를 거치며 여동생, 그리고 동급생 중 반 이상의 죽음을 겪었다. 1960년대 <제사> 연작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표면은 거칠고 총알이 몸을 뚫고 지나 간 듯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야말로 전쟁, 죽음의 상흔이다. 이는 전쟁과 야만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 존재의 기록이다. 이 시기 김창열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타들어가는 마음을, 부서진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진 존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의 그림은 김창열 자신처럼 침묵하고 있으나 동시에 절규하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집어삼킨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는, 그저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업을 위해 경찰, 고등 교사로 근무했던 그는 1965년 어렵게 록펠러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 체류하게 된다. 유학 중 넥타이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가며 경험한 뉴욕은 김창렬에게 있어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으로 가득한, 인간답지 않은 세계였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느낀 좌절은 한국전쟁과 그 고통 앞에서 겼었던 것을 넘어설 정도로 크나큰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차갑고 기계적인 현대사회의 환경에서 길을 잃었다."
그럼에도 뉴욕은 김창열에게 있어 거세게 현대 미술을 뉴욕에서 다양한 실험을 한 김창열의 회화를 살펴보면 거친 화면이 사라지고 매끄러운 기하학적 추상으로 변화한다. 김창열의 '뉴욕시기'는 곧 등장하게 될 '물방울 회화'를 구축하는 데 있어 필요한 과정이었다. 뉴욕에서 수많은 국제적 미술계의 변화를 목도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파리의 추운 겨울, 그리고 물방울
어렵게 간 프랑스에서도 마구간에서 생활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는, 어느 날 아침 물방울을 맞이한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파리가 30년 만에 가장 추웠던 겨울이었고, 나무 벽에 구멍이 숭숭 난 내 가난한 작업실은 정말 추웠습니다. 어느 날 밤, 작업을 했는데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이튿날 세수를 하고 작업실에 약간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화폭 뒷면에 물을 뿌렸습니다. 그때, 화폭 뒷면에 물방울이 맺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걸 보았는데, 그게 무척 놀랍고 감동적이었어요."
그는 2010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상흔 자국 하나하나가 물방울이 된 것"이라 말했다. 1960년대 그렸던 전쟁의 상흔, 제사, 죽음의 그림자가 물방울로 치환되어 떨어져 내리게 된 것이다. 그 물방울은 그가 그 당시 마음껏 흘리지 못하고 삼켰던 눈물일 수도, 모든 생명의 근원일 수도 있다.
가장 사소하지만 만물의 근원이자 생명인 물방울인 것이다. 미셀 앙리시 와의 인터뷰에서 "내개 있어 물방울을 그린다는 것 내 자아를 죽임으로써 고통을 불식시키는 행위"라고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있어 물방울 그리기는 이런 점에서 인간적인 고통과, 그리고 존재를 초월하고자 하고 가장 맑고 순수한 형태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수행처럼 읽힌다.
동양으로의 '회귀'
김창열의 극사실주의적인 물방울 회화는 기법적으로는 서구미술세계에 속해 있다. '트롱프뢰유(trompe-l'œil)'라 불리는 기법은 '눈을 속일 만큼' 사실적으로 그려서 실제 사물처럼 보이게 하는 회화기법이다. 그 기원은 17세기 북유럽 국가 정물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떻게 보면 김창열의 회화에서 동양적인 특성이 보이지는 않았던 것인데, 1989년대 작가는 또 한 번의 획기적인 시도를 꿰한다.
한자 텍스트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그린 것이다. 이는 그가 한자의 입체감과 흡입력에 주목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유년시절 할아버지에게 붓글씨를 배운 작가에게 한자는 향수 어린 기억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김창열의 동생 김창활은 <형님과 함께한 시간들>에서 이렇게 밝힌다.
"우리 형님은 할아버님 밑에서 천자문 공부를 시작했다... 영특하기 짝이 없는 이 맏손자의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 할아버님은 쏙 빠지셨다. 게다가 붓글씨 솜씨라니. 붓을 들어 신문지에다 천자문 한 획 한 획을 써 내려갈 때마다 할아버님의 찬탄과 칭찬의 말은 계속되었고, 그것이 귓맛에 어쩌다 달던지, 신문지가 새까매지도록 글씨 연습을 한 것이 우리 형님이었다."
텍스트로 쓰인 한자들은 천자문으로, 동양에서는 가장 근원을 이루는 문자다. 전쟁 전 평온하고 행복했던 유년기의 기억과 동양의 근간을 이루는 문자가 작가 개인적으로도, 동양화가로서도 짙은 정체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그의 향수로의 회기이자, 서양 화법에서 동양적 언어로의 회기였다. 프랑스 화단은 이에 열광했으며, 1996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문화예술공로 훈장을 받는다.
전시장에 설치된 다큐멘터리는 김창열이 손녀와 함께 작업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손녀는 할아버지를 돌아주기도 하고, 멍하니 작품을 함께 바라보기도 한다. 이 장면은 작가가 할아버지와 보냈을 오붓하고 아련한 기억들을 소환하는 듯 했다. 묵묵히 작품에 임하는 작가의 모습도 나온다.
명상적이며, 고독한 한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그 때문일까.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저 멍하게 쳐다보게 되는 힘이 있다. 소리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지만 그 존재가 강렬하다. 한 인간이 제대로 쏟아내 보지도 못한 채 꿀꺽 삼켰던 고통과 슬픔의 깊이가 그대로 전해 진다. 그 물방울은 몇몇의 관람객의 눈가에도 이내 물방울 한 방울씩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
참고
김창열 회고전 전시도록
김창활, <형님과 함께한 시간들>, 문예바다, 2016.
https://www.frieze.com/ko/article/frieze-week-magazine-seoul-2025-kim-tschang-yeul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509013319
ihttps://www.newsis.com/view/NISX20250821_0003298397https://www.newspim.com/news/view/2025082100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