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이 온다 - 우리의 일터를 고발합니다
어젯밤, 우울증이 온 것 같다는 남편과 술을 한잔 기울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번아웃 증후군에 가까워 보였다. 2020년,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는 그에게 모 대기업의 일명 '사약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일이 떨어졌고 반년 이상을 송두리째 빼앗겼다(코로나보다 더 독하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동거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들이 허다했으며 지친 안면을 마주하더라도 그는 대화를 나눌 기력 따위 남아있지 않았고, 혀가 마비되거나 잠을 못 이루는 등 육체적 고통에도 시달려야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드디어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지만 갑자기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자 우울과 무기력감이 스멀스멀 그의 마음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이러쿵저러쿵 그의 기분이 좋아질 방법들을 제안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고, 그저 이 어둠이 하루라도 빨리 지나가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남편은 유독 순수한 열의를 가진 순진한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냉정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깊고 깊은 속살은 나의 것보다도 한참 더 여리다. 하필 책임감까지 두둑이 갖고 있어서 더 안쓰럽다. 결국 그는 상처 받은 소년의 모습을 무방비하게 드러냈다. 새로 딴 위스키 병의 독한 액체가 점점 줄어들었다. 물론 일이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다. 일생의 의지를 갖고 임하는 일이라면 더욱 힘들고 어렵기 마련인데, 문제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에게 업무를 싸지르는 사람들에게 존중이란 없었다. 존중, 그게 그렇게 어려운 자질일 줄이야. 그저 인간적으로 하면 안 될 말을 하지 않고, 주말에는 본인만큼 상대방도 쉬는 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기의 몫은 자기가 하고.
내가 평생 회사라는 조직에서 일해본 것은 다 합쳐도 3년밖에 안 된다. 나는 그 짧고 귀한 시간 동안 존중이라는 것을 배웠나? 그 배 안에는 공동체라는 개념이 있었나?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필요할 때만 불려 가서 쓰고 버리는 부속품이라는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열정과 사명감의 끈을 붙잡아야 하는 걸까.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미래사회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동갑내기 남편과의 대화와 90년대생과의 대화에서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내가 그들처럼 사회초년생, 또는 슈퍼주니어일 때는 무엇이 불합리한지, 왜 이런 원인과 결과가 생기는지 몰랐는데 그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90년대생들은 맥락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아닌 것을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고,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거나 행동할 줄 알았다.
나는 이들이 지금의 모습 그대로 40대, 50대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나라 조직에도 존중의 문화가 당연해지길 바란다. 내 어린아이가 사회에 진출할 즈음에는 번아웃에 시달리는 사람이 거의 없도록, 정신이 말짱한 사람들과 함께 끝까지 열정과 사명감을 간직할 수 있는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너무 많이 바라는 건가? 그래도 나는 이 친구들에게 기대를 걸고 싶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