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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룬아 Feb 22. 2016

댄서 한선비 X 다큐감독 Isira Makuloluwe

소울메이트

가벼운 눈송이가 공기 중에 떠다니던 날, 당인리에서 둘을 만났다. 인터뷰보단 서로를 알기 위함이었는데, 처음 만났다는 사실을 인지할 새도 없이 커피는 두 잔째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터뷰를 언급하기도 전에 군산 촬영에 합류하게 되었다. 폭설주의보가 내린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KTX 안, 남자는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촬영 때문에 뾰루퉁해 있고, 여자는 미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못한 게 없다는 태연한 입장을 취한다. 그것 외에도 밥, 커피, 옷 같은 기본적인 사안부터 사고방식, 가치관 등 고차원적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의견을 투척하는 둘이었다. 

나라면 수시로 정곡을 찌르는 말에 마음 상한다고 토라졌을 일이다. 하지만 문화 충격도 잠시, 조금만 들어보면 그것이 서로에게 가장 솔직하게 충실한 방법이란 걸 알게 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투닥대던 그들은 스윙을 추러 홍대로 간다. 선생님에게 배운 스텝대로 열심히 행과 열을 맞추는 커플들 사이에서 그들만의 즉흥적인 춤사위를 펼친다. 어깨와 손, 허리와 다리, 발과 눈을 맞추는 그 순간은 설득이 필요 없는 둘만의 증거가 된다. 


한선비 (이하 선비)

Isira Makuloluwe (이시라 마쿨롤루와, 이하 이시)

ⓒ한선비


안녕하세요.

선비 - 안녕하세요. 5년 전에 결혼하고 포르투갈 리스본에 살면서 영국에서 현대무용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선비라고 합니다.


이시 - 저는 선비의 남편이에요. 현대무용과 안무를 오래 했는데 지금은 저널리스트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고 있어요. 태생은 스리랑카지만 어렸을 때 영국으로 이민을 갔고요. 그 외에 스페인, 뉴욕, 독일 등에서 살았고, 약 10년간 파리에서 안무를 했어요. 그러다 포르투갈이 제 라이프스타일과 가장 잘 맞다고 생각돼서 정착을 결심하게 됐죠. 


어떤 면에서 포르투갈이 마음에 들었나요?


이시 - 여유롭고, 안전하고, 물가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대서양을 마주하고 있어서 아름다워요. 유럽이지만 스리랑카와 비슷한 느낌도 나요. 그리고 아마 유럽에서 가장 다문화적인 나라일 거예요. 아프리카인, 인도인, 중국인 모두 포르투갈 사람과 섞이고, 외국어나 사투리를 써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인종차별이라는 게 없다고 볼 수 있죠. 


살고 싶은 도시를 고를 수 있다는 건 특권인 것 같아요.


선비 - 저에겐 도전에 가까웠어요. 평생 한국에서만 살다가 스물여섯에 갑자기 전혀 다른 삶을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시의 결정을 믿고 따르기로 했고, 지금은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한국사람들에게 포르투갈은 생소한 나라죠.


이시 - 최근 들어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관광객이 늘고 있는데, 아주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한때 세계에서 가장 유복한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유럽 역사가 세워지던 시기의 흔적들을 볼 수 있거든요. 지금은 자본주의 기준에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졌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굉장히 풍족한 나라예요. 특히 아티스트들에게 최고죠. 런던은 비싸고, 파리는 위험하고, 베를린은 정체되어 있어요. 어쩌면 리스본이  그다음일지도 모르겠네요. 아티스트들은 음식과 월세가 싼 곳을 찾기 마련이니까.

'Graze' 중.


둘 다 현대무용을 하고 있거나, 했었죠. 춤을 추던 과정이 있겠죠?


선비 - 어렸을 때부터 티비 앞에서 동생(한선천)과 춤추는 걸 제일 좋아했어요. 그러다 재즈댄스를 접해서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대학 전공을 고르다 보니 현대무용이 가장 근접하더라고요. 그렇다고 타고난 천재성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학교 다니면서 발견하게 됐죠.


그 사실을 어떻게 인지했나요?


선비 - 시험을 봤는데 무용과 전체 1등을 한 거예요. 조금 어리둥절했어요. 인문고 나와서 비교대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는 계속 장학금 받고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완전히 모범생이네요.


이시 - 전 모범생과 거리가 멀어요. 길거리에서 힙합을 추면서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길에서 춤추는 게 불법이라, 자리를 잡으면 경찰이 쫓아왔어요. 그게  11살쯤이었는데, 그렇게 10년을 췄어요. 그러다 클래식 발레가 배우고 싶어 졌어요. 힙합을 추다 보면 정석적인 기술에 집착이 생겨요. 그땐 힙합을 무용의 장르로 쳐주지 않았으니까요. 마침 같이 춤추던 형이 저에게 길거리보다 무대가 어울릴 것 같다며 학교에 가라고 말해서 발레를 배우게 됐어요.


대학에서 분자 생물학 전공을 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시 - 스리랑카에서 최고의 직업은 의사예요. 부모님이 의사이시고, 저 또한 의사가 되길 원하셔서 학교에 들어갔는데, 몰래 춤을 배우러 다녔어요. 스페인에서 발레를 배우고, 뉴욕에 가서 취직을 하고, 파리로 와서 제 회사를 만들었죠. 사실 전 프랑스, 특히 파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인종차별 등 시민의식이 낮고 폐쇄적이거든요. 하지만 세계적인 무대가 있고, 예술에 대한 이해와 지원이 대단하죠. 파리 사람들은 쇼핑이나 영화나 전시회나 모두 동일한 문화생활로 생각해요. 문화에 상하 개념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허세의 도구가 되지 않아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고방식이에요. 길에서는 피부색이 어두운 외국인이었지만, 무대 위에서만큼은 단 한 번도 이방인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두 분 모두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죠. 유럽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든 외형적으로는 외국인이니까요. 그래서인지 고향, 소통, 관계 등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계신 것 같아요.


이시 - 맞아요. 이민자의 자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죠. 다섯 살 때 영국으로 가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지금은 스리랑카 사람들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어요. 한국 오기 전 6주 동안 여행하며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죠.


선비 - 전 인종차별이 뭔지 5년 전에 처음 알게 되었어요. 성인이 된 후에 겪는 일들도 어린아이 만큼 힘든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은 많이 적응했고, 그런 경험들이 어떤 면에서는 자양분이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어렸을 때 남미에서 살면서 많은 경험을 했어요.  그중 일정 부분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죠.


이시 - 저도 그래요. 하지만 그래서 아티스트가 되는 거죠. 제가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문제가 있었을 거예요. 상처는 창의적인 활동으로 풀지 않으면 어두운 에너지로 바뀔 수 있어요.

ⓒHANDANCE


2014년에 프랑스에서 한선비/한선천 남매가 무대를 했어요. 안무는 한선비, 프로듀싱은 이시가 하셨다고.


선비 - 어느 날 한 프랑스 프로듀서와 저녁식사를 하는데, 제 꿈이 뭐냐고 물어보길래 동생과 함께 무대에 서는 거라고 했어요. 그게 발단이 되었죠. 평소에 니진스키 니진스카Nizinskii Nijinska 남매(1909년에 결성된 발레뤼스 발레단의 대표인물들)를 좋아하는데, 그들이 썼던 음악을 중심으로 선천이와 저와의 관계에 대해 안무를 만들었어요. 제목은 ‘친밀한’이에요. 


이시 - 제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만든 무대죠. 효율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대중과 상업성 때문이에요. 아티스트란 대중에게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그만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대중이예요. 진짜 강한 아티스트는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 알아요. 자기 세계 밖의 사람들을 사귀고 소통하죠. 그리고 더 큰 스케일에서 영향을 줄 줄 알아요. 안타깝게도 굉장히 희소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티스트는 로비스트일 뿐이에요.


그럼 유명해진 아티스트의 대부분을 로비스트라 생각하나요?


이시 -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가 정말 아티스트라고 생각하세요? 그것이 바로 명예와 부를 로비하는 거예요. 물론 그 안에도 일종의 반짝임이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하지만.


다시 한선비의 춤으로 돌아올게요. 영국 댄싱 타임즈Dancing TImes에 기사가 실렸었죠.


선비 - 2012년에 처음으로 영국에서 오디션 합격을 하고 데뷔 무대를 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반응을 찾아보니 더가디언The Guardian, 텔레그라프Telegraph, 인디펜던트Independent에서 제 이름을 거론하며 호평을 한 거예요. 8명이 함께 하는 무대라 주연도 아니었는데. 얼떨떨하면서 신기하기도 했어요. 후에 회사를 옮기고 'Strange Blooms'라는 무대를 했는데, 또 같은 매체에서 저를 언급하면서 기사를 냈더라고요. 그러다 댄싱 타임스에서 회사로 연락이 왔어요. 댄싱 타임스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무용 저널이에요. 한국인 최초로 Dancer of the Month로 뽑혀 특집 인터뷰가 실렸죠. 

“Sunbee Han stands out, dancing with cool power.”
-Zoë Anderson, The Independent, Dec 2013
"Superb,with Sunbee Han as the magnetic standout" 
-Sanjoy Roy, The Guardian, Feb 2013
“Sunbee Han, full of deep bends of the torso and immensely expressive use of the arms…” 
-Mark Monahan, The Telegraph, Feb2013
“You could imagine the beautiful Sunbee Han as the dance’s more sensuous equivalent to the violin soloist, with her airy fingers, arching body and luxuriantly splayed toes.” 
-Ismene Brown, The Arts desk Feb 2013
“Sunbee Han is sleek and elegant yet there’s a challenging edge to her dancing.” 
-Zoë Anderson,UK Dancing Times, Jan 2014

ⓒ한선비


무엇이 한선비를 돋보이게 했나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춤출 때 동작을 정확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손 끝, 눈빛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으려고 하긴 해요. 


김연아 선수의 연기가 마음에 와 닿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탄탄한 기본기 위에 지을 수 있는 성 같은 연기력.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습이 중요할 것 같아요. 교육에도 책임이 있겠죠?


이시 - 당연하죠. 훈련은 정말 중요해요. 요즘 아티스트들의 문제는, 흥미롭고 구미가 당기기는 하는데 기본기가 없다는 거예요. 무조건 클래식한 교육을 받으라는 게 아니에요. 자신이 관심 있는 장르를 파악하고 기본을 다진 후에야 그걸 부수고 재창조를 할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한국의 무용 교육은 어떤가요?


선비 - 일단 너무 대학에 집중돼있죠. 자고로 예술이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훈련이 돼야 하는데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고, 창의적인 면에는 여지가 없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모든 기회는 성적순으로 주어지죠. 아티스트도, 사회인도 될 준비가 안 된 채 모두 졸업을 해요. 게다가 졸업생이 해외 진출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아요.


유능한 무용수들은 해외 활동이 좀 있는 것 같던데요.


선비 - 극소수죠. 아마 이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투쟁을 했을 거예요. 사실상 한 번 나가면 돌아오기도 힘들어요. 웬만해선 문을 열어주지 않거든요.


이시 - 돌아온다고 해서 소속될만한 무엇이 있기는 한가요? 무대는 교수들이 꽉 잡고 있고, 모든 문은 그들의 콩쿨로 닫혀 있죠. 학생들은 3분짜리 주입식 솔로를 하기 위해 부모님 주머니에서 몇백만 원씩 써야 하고요.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모두 똑같은 무용을 하게끔 만든다는 거예요. 제가 가르칠 때도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에요. 기본은 같지만, 표현은 달라야죠.


교육 또한 하나의 산업이기에 바꾸기 쉽지 않다는 게 문제죠. 더욱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특징을 갖고 있고. 그 안에서 학생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뭘까요?


이시 - 수동적인 태도를 버려야 해요. 스승을 잘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으로 제안도 할 줄 알아야죠. 그러려면 수평적인 창의적 삶을 살아야 해요. 무용을 한다고 춤만 출 게 아니라, 밖에 나가서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라는 얘기예요.

Isira Makuloluwe


이시는 굉장한 유명세를 누렸었잖아요.


이시 - 그런 시절이 있었고,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어요. 물론 인지도 덕분에 하고 싶은 무대를 할 수 있었지만, 그 편리함이 눈을 멀게 해요. 유명할 때 시간을 많이 잃었어요. 저에게 주어진 많은 경험의 기회를 스스로 물리쳤죠. 


그래서 안무를 그만두고 미디어로 옮긴 건가요?


이시 - 이 세상에 무대에서 춤추는 사람 말고 뭔가 더 필요해 보였어요. 무대라는 건 끝나는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요. 관객은 문화를 즐기러 온 것뿐이라서. 사람들 손에는 아이폰이 계속 들려 있고, 끊임없이 정보가 주입되죠. 그래서 TV 저널리즘 공부를 시작했어요. 영상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었거든요.


다큐멘터리로 상까지 받았다고요.


이시 - 제 첫 작품이었어요. 'Shadow of the Bull'이라는 제목으로, 스페인 투우사에 대한 이야기예요. BJTC BritishJournalism Training Council에서 받았어요. 물론 상이 좋은 영상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길을 터줬죠. 방송국과도 일하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마흔이 넘어서 시작한 만큼 안무에서처럼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압박은 없어요. 그것보다는 제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다르기 위해서.


안무나 다큐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네요. 하지만 안무는 춤, 음악, 무대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전할  수밖에 없죠. 그에 비해 다큐멘터리는 굉장히 직접적일 텐데, 속이 조금 후련한가요?


이시 - 그래서 더 어려워요. 다큐멘터리야말로 정확도의 승부거든요. 그리고 즉각적으로 상업성을 고려해야 하죠. 제가 속한 장르도 확실하게 알아야 하고요. 무용은 차라리 쉬웠어요. 처음에는 스토리를 전달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는데, 끝자락에 가서는 움직임 자체에만 집중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가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최정상에서 자리를 놓고 내려왔어요. 내리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이시 - 전 조금 겸손하려고 해요. 한창 잘 나갈 때도 있었지만, 결국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요. 모두 밥 먹고 월세를 내고 옷을 사 입기 위해 돈을 버는 거죠. 아티스트의 성공은 그냥 밥걱정 안 하고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꼭 배가 고파야 아티스트가 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배고픈 아티스트들이 많아요.


이시 - 저도 배가 고팠어요. 참치 샌드위치만 먹으면서 매일 9시간씩 춤을 췄죠. 정말 간절했어요. 그래서 오디션을 다 땄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온갖 노력을 했어요. 그 순간은 아직도 잊지 않아요. 하지만 너무 길면 안 돼요. 동기가 될 수는 있지만 삶이 되어서는 안 돼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인데, 서로를 만나고 바뀐 삶은 어떤가요?


선비 - 사실 나이 차이를 잘 못 느껴요. 이시의 정신과 에너지가 워낙 젊어서, 또래라고 생각될 정도예요. 전 이시를 만나기 전까지 철저한 모범생이었고, 스스로 그런 면에서 완전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자리에서 할 일은 흠없이 해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보니 부족한 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전 빨래를 하는 법도, 요리를 하는 법도, 심지어 여행가방 싸는 법도 몰랐거든요. 진짜 삶을 사는 방법을 몰랐어요. 결혼을 하면서 저의 벽들을 넘는 세상과 만나기 시작한 거죠.


이시 - 전 결혼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선비를 만나고는 생각이 바뀌었죠. 선비가 스리랑카 여행을 와서 '난 한국사람이야. 너와 영원히 이렇게 연애할 수는 없어'라는데 그게 좀 귀여웠어요. 계속 만나고 싶은데 비자 때문에 시한부 연애를 해야 하고, 이 여자와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실 프러포즈하는 순간에도 결혼이 뭔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어느 순간 결혼이 현실이 되고, 그냥 하루하루를 같이 만들어가고 있어요. 파리의 집을 팔고 리스본에 집을 사고, 춤도 추고 여행도 하고 비자 문제와 씨름하고.


선비도 결혼은 뜻밖의 사건이었을 것 같아요. 어린 나이였을 텐데.


선비 - 맞아요. 하지만 이시와 함께 있고 싶었어요. 남편은 사진을 잘 찍고, 재즈를 좋아하고, 춤을 잘 추고, 웃기고... 우리는  개그코드가 정말 잘 맞거든요. 그리고 그와 살면서 꿈을 이루는 방법을 배워가요. 이시는 몽상가이지만, 현실적인 몽상가예요. 리스본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같이 포르투갈 부동산에 가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이에요.


둘은 서로에게 어떻게 영감이 되는지.


선비 -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돼요. 이시는 아무한테나 말을 잘 걸어요. 그렇게 만나게 되는 사람들,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가 어마어마해요. 이제는 터키에도 친구가 있고, 70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었어요.


이시 - 선비가 제 창작활동에 영감을 주진 않아요. 하지만 아내로서는 자극이 되곤 해요. 전 원래 편집을 전혀 할 줄 몰랐어요. 저널리즘 과제 중이었는데, 선비가 한심하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제 심기를 건드려서, 밤을 새우고 유튜브로 독학했어요. 그리고 아침에 선비를 깨워서 보여줬죠. 어찌나 후련하던지. 원래는 게을러서 그렇게 못하거든요. 

한편으로는 대리만족도 돼요. 선비가 계속 춤을 추고 있기에 제가 미련이나 갈증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그녀가 춤추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오랜만에 한국에 온 둘은 함께 스키장에 가고, 홍대의 골목에서 고로케와 컵치킨을  사 먹고, 찜질방에서 몸을 지졌다. 그리고 내내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춤에 대하여, 영화에 대하여, 스리랑카에 대하여, 비자 신청에 대하여. 매일이 알콩달콩하진 않아도 24시간이 지루하지 않다는 이시의 말에서, 이런 게 현실이라면 얼마든지-라는 만족감이 비쳤다. 안무가와 무용수에서 때로는 감독과 카메라맨으로 쿵짝을 맞추는 이 부부에게 지루함이라니. 


www.handance.com

vimeo.com/dancetheatremedia

'Shadow of the Bull' https://vimeo.com/99011963

'친밀한' https://www.youtube.com/watch?v=EujXvjrJS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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