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나도 너희에게 그런 사람이 될게.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파도를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유난할 것은 없었지만 깊고, 또 우리이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들. 서영이와 현정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면서 파도가 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를 등져 길어진 그림자에 파도가 밀려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가 그 자리에 여전히 앉아있으므로,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바다와 해변을 생각하면 늘, 아름답지만 영영 가질 수는 없는, 사라지는 것들이 생각났다. 백사장의 하얀 모래가 아름다워 주먹 가득 쥐어도 결국은 손가락 틈새로 새나가는 모래를 막을 수 없어 온통 손바닥에 모래의 잔상만 남는다는 슬픈 이야기나, 또 해변가를 따라 걸은 발걸음을 파도가 와서 지워버린 이야기나. 해변에 지어둔 모래성을 쓸어가는 파도 이야기나. 모래와 파도는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들을 은유하곤 했었다.


그런데 해변가에 앉아 이야기하는 우리의 그림자는, 파도가 아무리 쓸어내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의 배경이 되어 평범한 이야기들을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 넣어주는 것이었다. 잠시 해가 가려지면 그림자가 사라질 수는 있었지만,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한 다시 해가 뜨고 다시 그림자가 생겨났다. 그러니 파도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교직 2년 차, 담임 1년 차인 나는 뜨겁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이었다. 가장 순수하고 그러나 어쩌면 위험한 존재인 나는 이 아이들을 만나서 나의 온도를 나누기 좋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태어난 해가 달라 우리가 교실에서 만났지만 사실은 나이가 어릴 뿐 나보다 더 성숙하고 크고 깊은 존재들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경험하며 교직의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되었고, 내 경험과 믿음을 증명해 주며 오래도록 이제는 인생의 친구가 되어주는 이들에게 나의 생각과 고민과 미숙함을 스스럼없이 상담하고 조언도 얻고 배우고 깨달으며 그런 나의 부족한 면을 마주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주는 이들을 더욱 리스펙 하게 되었다. 여태 내가 이룬 게 뭘까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날들 끝에 문득 떠올리면 그래, 나 좀 괜찮은 사람일지도?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이들과 바닷가에 아무리 파도가 쳐와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로 나란히 앉을 수 있었던 순간이 또 나를 오랫동안 으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할 것이다.


너희들이 나에게 그렇듯 나도 너희에게 그런, 언제고 너희의 옆에 앉아 언제까지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너희의 행복한 순간을 함께하고 또 혼자인 것만 같아 마음이 닳아 아픈 순간에도 지워지지도 떠나지도 않는 그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게. 너희가 이미 내게 그런 사람들인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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