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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드라운 고슴도치 May 05. 2022

가지 않은 길과 인생의 나비효과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읽고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런데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아이들의 수업 이해도 편차는 크다. 그건 강사로서의 나의 자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아이들이 가지고있는 자원과 도구의 문제다. 애들이 수업에 들어올 때 들고 들어오는 도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학원 강사는 하지 않냐고? 단기전에서 한입거리로 음식 만들어서 입에 쑤셔넣어주는 건 누구나 한다. 다만 그걸 먹는 사람이 소화시켜서 자기 살로 만들 수 있느냐, 그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지.


 애들의 상태를 비유하자면 누구는 손에 티스푼을, 누구는 숟가락을, 누구는 국자를, 누구는 포크레인을 몰고 들어와서 딱 한 번만 땅을 파기로 하자! 하는 게 시험이다보니까, 애들은 애들대로 답답하고 나는 나대로 답답하다. 그래 뭐 우공이산이라고 티스푼으로 졸라 열심히 파면 어느 순간 포크레인을 이길 수도 있겠지... 근데 포크레인은 가만히 있을까? 도구를 바꾸는 게 빠르지 않을까? 근데 도구가 좋은 애들이라고 그걸 처음부터 타고난 건 아니다. 책을 좀 더 읽은 것이, 조금 더 먼저 개념을 익힌 것이, 조금 더 공부하는 방법을 익힌 것이, 말을 좀 더 골라 한 것이 지금의 도구를 쥐게 한 것이다. 그 작은 것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어서 만든 사람 조차 모르는 도구의 생성이었을 뿐.


그 작은 개념들이, 그 개념들을 익히는 선택이 나중의 결과들을 크게크게 바꾸는 것인데, 그래서 좀 짬을 내서 개념부터 다시 알려줘서 도구를 바꿔 싶은데 초조한 애들은 그게 쉽지가 않다.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 나는 한 발짝 빗겨서서 조망하는 입장에 있는, 당사자지만 1인칭 관찰자쯤 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막상 그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뀐다면, 내가 이렇게 알고 있는 사실도 거짓말같이 모르는 사실이 될 것이다. 다 알면서도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그런 거. 알면 뭐하나 피해가질 못하는데. 예지몽 꾸는 사람이 이런 기분인가.



이 책은 어바웃 타임, 뷰티인사이드, 킬미 힐미 등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은근 많이 왔다간 장르물이다. 물론 다른 삶을 살아본다는 장르물로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구운몽 정도고, 랜덤으로 자기 삶이 주어진다는 건 뷰티인사이드나 킬미힐미,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비슷한 것은 어바웃타임으로 포인트는 각자 다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킥은 번역이다. 원문은 읽을 영어 실력이 안 되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번역가님의 출중한 센스는 읽는 내내 이 소설이 외국 소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말투로 독자의 삶에 사뿐히 녹아온다.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갈수록 그 삶이 맛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삶이 그 삶 같고 그 놈이 그 놈 같은 게 아니라 결국 '죽고 싶다는 말'이 '살고 싶다는 말'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간다는 것.

 생각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한 인생을 살아간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간 자신이 믿어왔던 자신의 행복나 성취가, 심지어 이로 인해 자신을 잠식한 불행이나 행복이나 보람마저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보고 깨닫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심지어 죽기 직전까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노라를 통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이 참 그런 존재다. 우리한테는 아직 도서관이 있을지도 미지수고, 엘 부인 같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겠으니 노라를 보고 차근차근 깨달을 수밖에 없다. 노라는 그간의 자신의 선택들에 대해 자신이 했던 후회와 전혀 다른 시점에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게 너무 부러웠다. 특히나 연애를 할 때 조상님 찬스 혹은 주님의 사랑어린 시그널을 그동안 흐린 눈으로 지나쳐온 나에게, 그것이 응당의 담금질과 같은 시련이지 도망치라는 신호라는 것을 몰라본 척해온 나에게 그가 댄의 정체를 알게 되고, 매력적이지만 재미없는 남자, 착하지만 착하기만 한 남자, 무려 댄 때문에 지나쳤지만 진국이었던 남자들에 대한 조상님의 시그널을 객관적으로 볼 기회가 생긴 것, 자신이 가지 않은 길들에 대한 장단을 느끼고 미련으로 후회하고 살아가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찾고 자존감을 찾아가게 된 과정들을 직접 찍어먹어봐가면서 알게 된 것은 '결국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다소 진부할 수 있는 결론에도 불구하고 너무 부러웠다. 그러나 분명 내게도 유추해보건대, 그런 기회가 있었을 것이고, 나도 평행세계의 한 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내 가능성을 찍어먹어보고 있는 중일지도?


이틀 동안 숨도 안 쉬고 읽었다. 너무 재밌었다. 더 많이 쓰면 스포가 될 테니 스포해도 재밌겠지만 스포 안 할 거다 메롱. 베스트셀러가 베스트셀러이니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두 번 읽을 거다. 여러분도 두 번 읽으시라.



마지막으로 독서 장려짤 하나 올리고 마친다. 엘름부인의 낯선 모습을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개구라'라는 말을 쓴다며 표현하는 번역가님의 킥. 원문은 대체 뭐였을까.  


정리는 덜 됐지만 뭐라도 기록하고 싶어서 드릉드릉한 글이라 여러 번 수정될지도 모르지만 암튼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기록한다. 암튼 읽으시라, 강추. :)



#서평 #인플루엔셜 #내신내대(내신분으로내가대출받음)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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