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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Sep 28. 2022

네 삶을 살아줘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어릴 적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죽는 것이 슬프다기보다는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 같다는 느낌이 든달까?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었기에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


책의 초반에는 어린 요조의 모습이 딱하고 안쓰럽기도 했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꾸역꾸역 책을 다 읽고는 꽤 오랫동안 책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요조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책장에 꽂지 못한 채 테이블 위에 있는 책의 제목을 수차례 되뇌었다. 인간 실격, 인간, 실격. 스스로 인간 실격이라 말한다는 것, 내가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 어떤 사람이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나 스스로 나를 전혀 인정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에게는 살아있다는 자체가 참 지옥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던 그때의 나를 생각해보았다. 기대도, 희망도 없는 삶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썩 괜찮아 보일 수도 있는 삶이었기에 더더욱 나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두려웠던 나날들이었다. 어떤 계기가 있어 삶을 더 능동적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원래 삶 자체는 불행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어남도 내가 결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음도 내가 결정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삶이 더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랐고, 세상이 말하는 '행복'이라고 이상을 좇기보다는 그저 매일 안도하는 삶을 살기를 빌었다. 



서른아홉, 다자이 오사무는 삶을 마감했고 나는 이제 곧 마흔이 된다. 불혹,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글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저 세상의 잣대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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