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현 May 11. 2019

지금 있는 그곳에서 안녕하기를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를 알게 된 건 2016년 북바이북에서 진행한 작가 임경선의 북콘서트에서였습니다. 『태도에 관하여』라는 책을 읽고 작가가 참 건강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 때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에서 ‘헉소리 상담소’라는 코너의 고정 게스트로 나와 속 시원한 답변을 해준 그녀였기에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북콘서트가 무척 기대됐습니다. 3년 전의 일이라 그녀가 했던 이야기들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책에서처럼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굉장히 진솔하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여러 인터뷰나 글을 통해 임경선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북콘서트 중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했고요, 저 또한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지라 묘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작가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다 글이 좋으면 작가는 과연 어떤 책을 읽으며 영감을 얻는지 궁금해졌던 터라 그 자리에서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를 검색해보았습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유명한 작가였는데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짧은 순간 느꼈던 동질감이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처음 읽게 된 줌파 라히리의 책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라는 책이었습니다. 작가는 뱅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영국계 작가인데 인종과 국적으로 인해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중 이탈리아어를 듣고 이 언어야 말로 자신의 언어라는 확신을 갖고 이탈리아어를 배우게 됩니다. 처음 이탈리아어로 쓴 에세이인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200페이지가 안 되는 짧은 책인데도 저는 그녀의 생각과 시선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읽은 『내가 있는 곳』은 그녀의 신작으로 이탈리아어로 쓴 첫 번째 소설입니다.


처음에는 소설인지 모르고 읽어서 화자가 당연히 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읽다 보니 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화자가 저자와 비슷하다고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책의 초반에 적혀 있던 문장에서 언제나 그녀의 책에서 느껴지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나이면서 그렇지 않아요. 떠나지만 늘 이곳에 남아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다른 사람이나 사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허투루 지나치는 것이 없는 그녀를 보며 자신에게 무심하지 않아야 비로소 타인도 잘 들여다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또한 지금 제가 있는 곳, 이 사소한 것에서부터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바라보게 되는 누군가 또한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에요. 



 문장 기록

p 22

우리는 가까이 언제든 금방 찾아갈 수 있는 곳에 머물지만 난 홀로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p 45

외롭고 집에서 나갈 때 불을 끄지 않더라도 혼자 사는 게 좋고 내 시간과 공간의 주인임을 느끼고 싶다고 말한다면, 엄마는 날 못 미더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외로움은 결핍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엄마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나가는 작은 만족들은 엄마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나에 대한 엄마의 집착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가 보는 시각에는 관심이 없다. 내게 진짜 외로움을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이 격차다.


p 59

수영장은 아주 크고, 여러 개의 레인이 있다. 거의 여덟 명이 다 찬다. 분리된 여덟 개의 삶이 서로 마주치지 않고 그 물을 함께 나눈다.


p 79

일단 표를 구매하면 바꿀 수 없다. 표를 사는 건 신뢰의 행위이자 심지어 건방지고 위험한 행동인 것 같다. 날 불안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대담하다고 느끼게 한다.


p 127

노부인(수술은 받은  노부인을 부축하는 노신사, 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지금 공원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며 놀고 있는 아이들보다 더 활기가 넘쳐 보인다.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의 이미지가 날 감동시킨다. 그들 사이의 헌신, 연결된 삶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난 우리 안에 흐르는, 순환되어야 하는 규칙적으로 제거돼야 하는 물질을 생각한다. 숨겨진, 흉하지만, 중요한 작업들.


p 149

몇 년 전부터 문구점은 내 중심 거점이다. 학생 시절 나는 늘 그곳에서 학교와 대학교에서 필요한 물건, 지금은 수업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사곤 했다. 필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문구점에서 산 물건들은 모두 날 행복하게 해 준다. 내 존재를 확인해준다.


p 151

누가 문구점에 가서 그 노트들을 사겠는가? 학생들은 사실 손으로 글씨를 쓰지 않는다. 정보를 얻고 세상을 여행하자면 자판만 두드리면 된다. 학생들의 생각은 화면에서 돋아나고, 누구든지 이용 가능한 존재하지 않는 구름 속에 산다.








매거진의 이전글 숨을 쉬고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