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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런 Feb 20. 2021

카드빚 돌려막기 같은 공부

사교육비 투자 전 필수 과제 (3)


줄줄이 새는 빚을 방치한 채 미래 소득을 저당 잡히면 당장 눈 앞의 불을 끄려다 빠져나올 수 없는 빚더미에 깔리게 됩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신용카드 자르기 팁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신용카드를 자르기 전에 먼저 카드사에 지고 있는 빚을 모두 청산하고 잘라야 합니다. 그리고 빚 없이 가진 돈 안에서 계획적인 소비를 하고 저축을 하면서 돈을 불려 나가는 것이 재테크의 시작입니다.


학습 결손을 보충하지 않은 채 선행 학습을 하는 것 역시 카드빚을 돌려 막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다음 학년의 공부를 미리 하는 것 말입니다. 현금이 없는데 카드빚을 내서 주변에 돈 많은 친구들의 수준에 맞춰 같이 먹고 마시는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선행 학습을 하는 친구들의 자랑이, 학원에서는 레벨 테스트의 결과가 우리 애만 뒤처지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조장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가 주위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부모님께서 든든한 신뢰를 보태주시면 어떨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녀의 발달 과정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발달 단계와 속도


저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여러 가지 성장발달 표를 찾아보며 각종 발달 과업을 아이가 잘 따라가고 있는지 늘 비교했습니다. 몇 주쯤 목을 가누고, 뒤집고, 기어가는지 마음으로 정해 놓은 마지막 시기를 넘어가도 아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을 때는 발달이 뒤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많이 초조했습니다.


가장 걱정했던 것은 첫 유치가 나는 시기였습니다. 

빠른 아이들은 4,5개월째 나오고 보통 6개월이면 나온다는 데 아이는 이유식을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도 이가 나올 생각을 안 했습니다.

가끔 유치가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걱정하며 커뮤니티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중에 돌 이후에 나오는 늦은 아이도 있다는 댓글 하나를 믿고 기다린 결과 드디어 돌 때쯤 유치가 나왔습니다.


지나고 나서 과거를 돌아보니 아이는 평균보다 목을 가누는 것도 느렸고 기는 것도 느렸습니다. 대신 배밀이는 건너뛰었고 걷는 것과 말하기는 조금 빨랐지만요.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평균 발달 시기를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순서와 기간을 두고 하나씩 해냈습니다.

그동안 엄마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려주는 일뿐이었습니다.



※ 연령별 뇌 발달 5단계

1단계(24개월까지): 오감 발달과 뉴런 시냅스의 급격한 발달
2단계(48개월까지): 종합적 사고 발달(전두엽)과 정서적 안정의 기초(변연계)
3단계(학령 전까지): 창의력과 정서 발달(전두엽과 우뇌)
4단계(초등): 수학과 추상적 개념 발달
5단계(20세): 시각적으로 추상적 개념 이해, 변연계 활성화
-김영훈 <적기두뇌>


연령별 뇌 단계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거쳐가는 발달 순서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 단계를 가르는 시기는 단지 평균을 나타낸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추상적 개념이 발달하지 않은 채 중학생이 될 수 있고 시각적인 추상 개념 이해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가능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연령별 발달 단계에 따라 짜여 있는 학교 교육과정


학교 교육과정은 각 학년의 발달 단계에 적합한 학습 성취 기준을 중심으로 만들어집니다.

문제는 그 단계가 학생들의 평균에 맞춘 것이기 때문에 일부 발달 속도가 더딘 학생들은 공부를 못 한다고 오해받기 쉽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분야에서 조금 느린 것뿐인데 자신의 지능이 낮다고 오해하고 공부를 쉽게 포기합니다.


전 고등학생 때 물리 과목의 파동 개념을 어렵게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책을 봐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이해를 포기한 채 공식만 외우고 문제집을 기계적으로 푸는 연습을 해서 간신히 시험을 봤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대학교에서 일반물리학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기분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강의를 들었는데 이게 웬일일까요. 며칠이 지나고 이제 곧 어려운 부분이 나오겠지 하는 순간 파동에 대한 강의는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당시 어리둥절해서 전공 책을 다시 훑어보는 것은 물론 집에 와서 고등학교 때 이해가 안 갔던 그 물리 교과서를 꺼내 뒤적였던 기억이 납니다. 신기하게도 고등학생 때 그렇게 이해가 안 갔던 부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답을 몇 년 후 우연히 들은 뇌과학 강의에서 찾았습니다.

뇌는 진화 단계에 따라 만들어진 3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생명 유지 기능을 담당하는 파충류의 뇌(뇌간)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포유류의 뇌(변연계), 고차원적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영장류의 뇌(대뇌피질)가 그것입니다.

이중 학습과 직접 연관되는 대뇌피질의 전두엽은 20세를 넘어 25세까지도 발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물론 평균이므로 더 많은 나이까지 성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지식과 경험이 쌓여 관련 정보의 양 자체가 많아지며 서로 다른 개념을 연관시키고 요약, 정리하는 기술적 능력이 향상되니 학습 능력은 계속 발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파동을 어려워했던 것은 아직 관련 지식의 양이 부족한 데다 이해할 머리가 덜 발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두뇌가 발달하기 전에는 과분한 공부에 좌절하고 발달이 충분히 되었을 땐 이미 졸업해서 공부를 멀리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한 아이 안에서도 영역별로 다른 발달 속도


뇌에서 국어, 영어와 관련된 언어 중추 영역은 해당 학년의 수준으로 충분히 발달했지만 수학에 필요한 수리력과 논리적 사고 능력에 관련된 영역의 발달이 늦는 경우는 어떨까요? 

이때 다른 과목과 비교해 너무 낮은 수학 점수에 위기감을 느껴 더욱 사교육에 매달리기 쉬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당장 빨리 커서 높은 곳의 물건을 스스로 꺼내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무리한 선행학습은 더욱 수학에 대한 좌절감을 가져올 것입니다. 

수학 자체가 싫어져 아예 포기하는 결과보다는 발달 속도가 영역별로 다른 점을 존중해서 조금 늦더라도 부족한 공부를 천천히 채워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면 학교를 다닐 때 집착했던 점수가 제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진 않습니다.

그저 그 점수가 제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만 같아 스트레스를 받았고 도리어 공부를 싫어하게 된 요인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점수보다 중요한 것이 학습에 대한 재미와 자신감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이를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어떤 과목이든 실망스러운 점수를 받더라도 아직 발달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고 때가 되면 잘할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공부에 흥미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뇌가 자랄수록 더욱 발달하는 우상향 그래프를 그린다면 천천히 기다려줄수록 더욱 수월하고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제가 바라는 이상적인 공부 모습은 배우는데 필요한 만큼 자신의 뇌가 발달하는 때를 기다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며 공부하는 것입니다.

눌어붙은 밥솥을 서둘러 박박 긁어내느라 힘은 힘대로 들이면서 밥솥에 흠집을 내는 것보다 충분히 물에 불려서 한번 쓱 닦아내는 걸로 힘을 아끼고 밥솥도 손상시키지 않고 싶습니다.



저는 마흔이 돼서야 그렇게 하기 싫었던 공부에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모두 이런 재미를 느끼며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중학생이 뒤처진 공부 때문에 초등학생 문제집을 다시 풀게 되더라도 이제는 다 알겠다며 신나게 풀고 다 맞았다고 자랑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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