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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Oct 25. 2016

이 맥주는 서쪽 서울의 맛

강서 맥주를 마셔봤다

나는 초심을 잃었다.


초심이란 뭘까. 나는 왜 낮술도 하지 못하고 이리도 정신없이 살고 있는 것인가. 남의 돈을 받지 않고 살면 더 자유로울 줄 알았죠. 왜 아무도 나에게 스타트업이란 미친 듯이 바쁜 운명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나요? 디에디트를 하면 리뷰를 핑계로 365일 중에 300일 정도는 낮술을 하며 방탕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세상일이 참 내 맘 같지 않아요.



벌써 몇 달이 지났네요. 해를 보며 낮술을 마신 지 말이에요. 이대로는 안되겠어요. 마침 날씨도 좋은데 우리 낮술이나 해요. 그리하여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디에디트 낮술 이야기. 맥주는 강서, 안주는 청계천.


[청계천이 안주라는 건 허세고 진짜 안주는 맥도날드 슈슈버거 세트]



강서는 맥주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이름에 지명을 딴 맥주는 없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한라산 소주 정도? 강서는 한강의 서쪽을 말한다. 아니 그런데 요즘 뜨는 수많은 동네를 두고 웬 강서?


이유는 꽤 서정적이다. 강서구 발산동의 작은 맥주전문점에서 시작해 강원도 횡성의 마이크로 브류어리가 된 세븐브로이가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맥주라고.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푸른 라벨엔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로 강서라는 글자가 정직하게도 적혀있다. 차가운 푸른빛 도시 밤하늘 한 구석엔 강서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김포공항 관제탑도 깨알같이 그려 넣었다.


강서 같은 맛이 나서 난다고 했는데 왜냐고 물으시면


아무튼 재미있는 맥주다. 점심시간마다 직장인들에게 숨쉴 공간을 주는 청계천에서 맥주를 마셔보자. 병맥을 따는 에디터H의 서툰 손놀림이 분주하다.


강서는 마일드 에일이다. 마일드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온화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다. 현재 3병에 만원 행사를 하고 있는 홈플러스에 따르면 은은한 열대과일 향이 난다고 하는데, 너무 은은해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열대과일 향이 나지 않아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시면 소녀 할 말이 없사옵니다.


조금 아쉽다. 평소 향이 강한 맥주를 좋아하는 내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 에일 맥주에 물을 세 스푼 떨어뜨린 것 같은 맹숭맹숭한 맛이었다. 하지만 에디터H는 물처럼 편하게 마실 수 있어 좋다며 한 병을 뚝딱 원샷하더라. 맥주는 물이 아닌데 왜 물처럼 마시는걸까. 그래. 향이 강하든 약하든 뭐 어때. 모처럼의 낮술에 우린 즐거웠다. 서울 한 구석의 동네 이름을 딴 이름도 괜히 끌리고 말이다. 기사를 다 쓴 이 마당에 생각난건데, 내가 딱 십년 전에 안산 강서 고등학교를 나왔더라. 너무 오래되서 까먹고 있었지 뭐야. 물론 이 맥주는 서울 강서지만. 하하.

마치 내 소녀시절처럼 싱겁고 풋풋한 맛의 맥주였다. 덕분에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아, 이것이 강서의 맛일까.


아, 내가 가격을 깜빡했나? 한 병에 3,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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