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 맥주를 마셔봤다
나는 초심을 잃었다.
초심이란 뭘까. 나는 왜 낮술도 하지 못하고 이리도 정신없이 살고 있는 것인가. 남의 돈을 받지 않고 살면 더 자유로울 줄 알았죠. 왜 아무도 나에게 스타트업이란 미친 듯이 바쁜 운명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나요? 디에디트를 하면 리뷰를 핑계로 365일 중에 300일 정도는 낮술을 하며 방탕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세상일이 참 내 맘 같지 않아요.
벌써 몇 달이 지났네요. 해를 보며 낮술을 마신 지 말이에요. 이대로는 안되겠어요. 마침 날씨도 좋은데 우리 낮술이나 해요. 그리하여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디에디트 낮술 이야기. 맥주는 강서, 안주는 청계천.
아직 우리나라에서 이름에 지명을 딴 맥주는 없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한라산 소주 정도? 강서는 한강의 서쪽을 말한다. 아니 그런데 요즘 뜨는 수많은 동네를 두고 웬 강서?
이유는 꽤 서정적이다. 강서구 발산동의 작은 맥주전문점에서 시작해 강원도 횡성의 마이크로 브류어리가 된 세븐브로이가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맥주라고.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푸른 라벨엔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로 강서라는 글자가 정직하게도 적혀있다. 차가운 푸른빛 도시 밤하늘 한 구석엔 강서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김포공항 관제탑도 깨알같이 그려 넣었다.
아무튼 재미있는 맥주다. 점심시간마다 직장인들에게 숨쉴 공간을 주는 청계천에서 맥주를 마셔보자. 병맥을 따는 에디터H의 서툰 손놀림이 분주하다.
강서는 마일드 에일이다. 마일드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온화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다. 현재 3병에 만원 행사를 하고 있는 홈플러스에 따르면 은은한 열대과일 향이 난다고 하는데, 너무 은은해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열대과일 향이 나지 않아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시면 소녀 할 말이 없사옵니다.
조금 아쉽다. 평소 향이 강한 맥주를 좋아하는 내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 에일 맥주에 물을 세 스푼 떨어뜨린 것 같은 맹숭맹숭한 맛이었다. 하지만 에디터H는 물처럼 편하게 마실 수 있어 좋다며 한 병을 뚝딱 원샷하더라. 맥주는 물이 아닌데 왜 물처럼 마시는걸까. 그래. 향이 강하든 약하든 뭐 어때. 모처럼의 낮술에 우린 즐거웠다. 서울 한 구석의 동네 이름을 딴 이름도 괜히 끌리고 말이다. 기사를 다 쓴 이 마당에 생각난건데, 내가 딱 십년 전에 안산 강서 고등학교를 나왔더라. 너무 오래되서 까먹고 있었지 뭐야. 물론 이 맥주는 서울 강서지만. 하하.
마치 내 소녀시절처럼 싱겁고 풋풋한 맛의 맥주였다. 덕분에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아, 이것이 강서의 맛일까.
아, 내가 가격을 깜빡했나? 한 병에 3,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