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욕망하는 브랜드 chanel
어릴 적 나의 꿈은 우아한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우-아하다. 발음부터 근사하다. 고상하고 기품있으며, 아름다운 모습을 일컫는 단어다. 몹시 추상적인 꿈이었지만 머릿속에 그리던 이미지만은 구체적이었다. 경박한 무리를 상대할 때도 의연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호들갑 떨지 않는. 진주 목걸이와 트위드 재킷에 과장되지 않은 실루엣의 스커트를 입은.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샤넬 스타일의.
어른이 된 나는 어쩐지 내 바람과는 다른 인물이 된 것 같지만,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를 묻는다면 여전히 (애플과) 샤넬이라고 답한다. 누군가는 내 대답을 듣고 “되게 비싼 브랜드를 좋아하는구나”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반은 맞고 나머지 반은 틀렸다. 나는 본래 럭셔리 브랜드를 좋아하지만 그게 꼭 가격표에서 비롯되는 사랑은 아니니까.
세상에는 가브리엘 샤넬이 남겼다는 수많은 명언이 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건 이 문장이겠다.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맞다. 그리고 그 문장으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지만 샤넬은 여전히 스타일이고, 문화다.
미디어에서 자본의 노예가 된 현대인의 삶을 표현할 때 샤넬이나 루이비통의 로고를 상징적으로 박아넣곤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본래의 샤넬은 여성 해방의 아이콘이었다.
가브리엘 샤넬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세탁부였던 어머니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가난한 행상인이었던 아버지는 12살 짜리 딸을 고아원에 버린다.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삶의 시작에서도 이 도도한 여자는 패션을 배웠다. 그녀가 성장한 고아원은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곳인데, 덕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훗날 블랙과 화이트만으로 화려함을 표현하는 기법에 매료된 것도 이에서 비롯된다. 심지어 바느질을 배운 곳도 고아원이었다.
흔히 ‘코코’ 샤넬이라고 부르는 그녀의 별칭 역시 처음부터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밤마다 캬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을 했는데, ‘누가 트로카데로에서 코코를 보았는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얻은 별명이었다. 재밌는 건 샤넬이 코코라는 별명을 썩 좋아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지어준 것처럼 말하고 다녔다는 일화다. 훗날 코코라는 별명을 자신의 브랜드에 사용한 아이러니 또한 흥미롭고 말이다.
그 시대의 여성들의 삶이 으레 그랬듯 샤넬의 삶을 처음 바꾼 건 남자였다. 그것도 부유한 남자. 돈 많은 장교의 애인이 되며 상류 사회에 발을 들인 것. 그는 가브리엘에게 모자 가게를 차려줬는데, 당시엔 정부(mistress)에게 모자 가게를 차려주는 게 유행이었다더라. 1910년의 여성 모자는 커다란 리본과 꽃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샤넬은 블랙을 기본으로 한 소박하고 심플한 디자인을 만들었다. 패션 피플들에게 빈곤해 보인다고 외면받았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첫 손님은 매춘부였다. 그러나 유행은 예측할 수 없는 것. 깍쟁이같은 파리의 여자들은 금세 새로운 디자인에 홀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샤넬의 인생은 격정의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다.
샤넬은 당시 애인이었던 에티엔의 친구 보이 카펠과 사랑에 빠졌다. 모자 가게를 차려준 애인을 배신(?)할 만큼 몹시 잘생긴 영국 신사였다. 남겨진 이야기만 보면 샤넬은 에티엔에게 꽤 가혹했던 것 같다. 친구와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사업 자금을 더 빌려달라는 요구까지 했다더라. 거절당하긴 했지만. 이런 사연에도 불구하고 샤넬과 에티엔은 친구로 남았다고 하니 남녀 사이는 알 수 없다. 하긴, 아마 에티엔에게는 다른 애인도 있었을 테니 너무 동정할 필요는 없겠다.
샤넬의 잘생긴 뉴 애인 카펠은 그녀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투자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일생일대의 사랑이자 조력자를 만난 샤넬은 파리 캄봉거리에 첫 번째 부티크를 오픈한다. 그 뒤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남성복에서 영감을 얻어 여성복을 만들었으며, 길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발목과 다리가 보이도록 잘라냈고, 소년처럼 머리를 짧게 잘라버렸다. 당시엔 하인들의 옷이나 상복에만 쓰이던 블랙을 사용해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다. 화려한 보석으로만 쥬얼리를 만들던 시대에 인조 보석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 역시 충격이었다. 편안하고 실용적인 것만이 패션이 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모토였다.
새로운 것에는 언제나 반발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당시 귀족 여성들 사이에선 샤넬의 의상을 ‘Poor look’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더라. 하지만 샤넬은 편하지 않으면 럭셔리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아, 너무나 멋있다. 그 시대엔 클래식을 파괴한 혁명이었던 샤넬의 의상이 지금은 새로운 클래식이자 럭셔리가 됐다. 샤넬의 상징과도 같은 트위드 재킷 역시 군복에서 모티브를 얻어 브레이브 장식과 패치 포켓을 적용한 것이다. 여성들의 숨통을 조이던 코르셋을 몰아내고 짧고 여유 있는 핏의 재킷을 유행시킨 것이다. 움직이기 편하지만 품위 있고, 실용적이지만 아름다운 옷이었다.
첫 부티크가 생겼던 캄봉 거리의 샤넬 부티크에 가본 일이 있다. 서른 살이 되던 기념으로 첫 샤넬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중국인이 너무 많아서 도떼기 시장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 화사하고 단정한 진열대 앞을 거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특별한 일’을 치르러 온 것처럼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계산을 기다리며 마시는 샴페인이나, 곱게 포장된 박스 위에 붙은 하얀 까멜리에도 다 좋았다. 그 가방이 내 인생을 바꿔주거나 날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준 건 아니었다. 근데 그냥 욕망하고, 기다리고, 손에 넣어 손때 타며 내 것이 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몇 년을 욕망해도 한결같이 갖고 싶은 브랜드란 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지난 주말에 찾았던 홍대 앞의 ‘코코 게임센터’ 때문이다. 샤넬 코스메틱을 홍보하기 위한 팝업스토어인데 강렬한 비주얼을 자랑한다. 매장 안은 마치 오락실처럼 꾸며져 있다. 샤넬 립스틱이 진열된 게임기는 버튼을 누르면 화면이 거울이 되기도 하고, 복고풍 게임기로 변신하기도 한다. 샤넬 코인을 넣으면 화장품을 뽑을 수 있는 인형 뽑기 기계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연신 인증샷을 찍어대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패션 부티크와 코스메틱 매장은 다른 사업부이긴 하지만, 샤넬이 가진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차별화된 기획임은 분명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시 둘러보고, 몇 가지 화장품을 구입해서 바로 빠져나왔다. 이상하게도 카운터 앞은 한산하더라. 스토어 안을 채운 인파는 대부분 뺨이 발그레한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엄밀히 말하면 샤넬의 고객층보다 한참 어린 손님들이었다. 특별히 물건을 구입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 깜찍한 이벤트는 미래의 손님들을 마중 나온 것처럼 보였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샤넬을 꿈꾸게 될 거야, 라는 자신만만한 메시지를 던지면서 말이다.
혹자는 고급 브랜드의 색을 해치는 경박한 마케팅이라고 하던데 내 생각은 다르다. 파리패션위크 런웨이를 거대한 슈퍼마켓으로 만들었을 때도, 흑백의 그래픽 웹툰을 만들었을 때도 샤넬은 항상 새로웠다. 새로운 세대를 자극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가 바뀌어도 모두의 판타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나는 영상이 있어 첨부한다. 아주 오래전에 본 포르쉐의 TV 광고인데 아쉽게도 고화질 버전은 구하지 못했다. 어린 초딩 소년이 포르쉐 매장에 들어가 911 모델을 꼼꼼히 살펴보고, 세일즈맨에게 명함을 받아 20년 뒤에 사러 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깜찍한 광고다. 드림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포르쉐는 그 브랜드를 욕망하고 꿈꾸는 경험과 시간 자체를 판매한다는 것이다. 이 브랜드가 가진 스토리가 20년을 기다릴 가치가 있을 만큼 황홀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때로 시궁창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나면 집에 들어와 생각한다. 내가 꿈꾸던 우아함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 변덕스럽고 얄팍한 내 마음은 하루에도 수 십번씩 뒤집히는데,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브랜드가 된 여자의 삶은 얼마나 견고해 보이는지. 코코의 이니셜을 나란히 포개놓은 샤넬의 마크는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브랜드가 주는 판타지는 다르다. 지금보다 더 우아하게 살고 싶다. 흔들리지 않고, 겁먹지 않고,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