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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Jun 12. 2018

저렴하고 이국적인 식재료 앞에 난 탐욕스러워졌다

안녕, 포르투의 큰 손 에디터H다. 이곳에 한 달간 지내며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단연컨대 마트다. 집 앞 1분 거리에 있는 청과물점은 하루에도 두 번씩 방문했고, 10분 거리에 있는 대형 마트도 매일 같이 들락거렸다. 저렴하고 이국적인 식재료를 눈앞에 둔 나는 흡사 명품 아울렛에 갔을 때처럼 탐욕스러워진다. 탐구심과 도전의식이 솟구친다.



재밌는 사실은 이국적인 식재료를 바리바리 사들고 가지만 결과물은 항상 한식이라는 것이다. 유럽까지 가서 굳이 한식을 해 먹는 내 입맛이 촌스럽다고? 일주일 여행이면 모를까, 한 달을 지내면서 밥을 끊는다는 건 정말 잔인한 일이다.



쌀도 이렇게 예쁘게 판다. 종류가 아주 많은데 우리나라 쌀과는 조금씩 다르다. 알이 더 작고 가늘어서 냄비밥하기 알맞다. 빨리 익는 대신 차진 맛이 덜하다. 한국 밥맛을 흉내 내고 싶다면 ‘스시’용 일본쌀을 구입하면 된다. 대신 두 배쯤 더 비싸다는 게 함정.



막내 에디터에게 포르투에서 제일 맛있었던 식당이 어디냐고 물으니 ‘우리집’이라 답한다. 그렇다. 여기는 포르투 이층집에 자리한 H식당. 해외 살이와 노동에 지쳐가는 우리 에디터들에게 따뜻한 고향의 맛을 대접한다. 먹는 얘기만큼 재밌는 게 어딨을까. 우리가 얼마나 잘 먹고 지냈는지 슬쩍 보여드리려고 한다.



냉장고는 언제나 풀방이다. 스테이크 세 덩이와 곁들일 채소, 온갖 치즈와 달걀, 버터. 심지어 소스도 완벽하다. 머스터드, 케첩, 마요네즈, 레몬즙, 핫소스까지. 술과 음료도 종류별로 갖추고 있다. 떨어지기 전에 채워넣는다는 게 우리의 철칙이다.



이번엔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는 은밀한 장소, 우리의 음식 창고다. 어두운 벽장처럼 숨겨진 공간이 있는데 여기에 상하지 않는 식재료를 몽땅 쌓아두었다. 봉지라면을 23개나 챙겨온 에디터H의 집요함이 들통나는 순간이다. 짜파게티, 불닭볶음면, 신라면, 너구리, 굴짬뽕… 라면 라인업도 밸런스를 지키며 선별하느라 힘들었다. 여기에 크래커와 식빵, 레드 와인이 합세해 은밀하면서도 달콤한 분위기를 풍긴다. 오른쪽엔 막내 에디터가 사모은 뻥튀기 같은 과자들이 잔뜩 쌓여있다. 문을 열 때마다 행복해진다. 우린 부자구나.



먼저 가장 좋은 평을 받았던 문어 볶음이다. 매콤한 게 땡길 무렵에 마트에서 사온 뽈보(Polvo, 문어)! 지독하게 큰 포르투갈 파와 이상하게 매운 양파를 넣고 달달볶았다. 엄마가 챙겨준 고춧가루와 고추장은 정말 유용했다. 게다가 우리집 고춧가루가 워낙 매워서 단번에 마음을 채워주는 알싸한 매운 맛이 완성된다.



포르투에서는 아무 식당에 들어가 문어구이나 문어요리를 시켜도 맛이 좋다. 특히 식감이 예술이다. 적당히 텍스쳐가 살아있으면서, 신기할 정도 연하다. 두어번 씹으면 푸딩처럼 녹아버린다. 비밀이 대체 무얼까? 식재료 자체에 차이가 있으리라 예상하고 직접 조리해보았지만 너무 오래 볶아서인지 질겼다. 아무래도 비결은 조리 과정에 있는 것 같다. 아직도 비밀을 찾지 못했다.



매운 반찬엔 국물이 있어야지! 바지락과 모시조개로 추측되는 요상한 무늬의 조개를 한 봉지 사다가 가득 넣고 국물을 보글보글 끓였다. 별다른 재료 없이도 끝내주는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왔다. 이 동네 파는 너무 크고 억세서 볶아먹긴 질기지만 국물내기용으론 알맞은 것 같다. 조개 담다가 실수로 들어간 새우도 맛이 좋다.



가볍게 곁들인 화이트 와인. 생각보다 단 맛이 강해서 아쉬웠다. 하지만 2유로에 이런 와인이라니.



전날 밤에 먹고 남은 조갯국이 못내 아쉽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끓여서 봉골레 파스타로 재탄생 시켰다. 맥주를 부르는 맛이다. 속이 텅텅 빈 조개 껍질이 대부분이다. 그냥 데코레이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봉골레 파스타엔 조개 육수도 중요하지만, 포크질을 할 때마다 조개 껍질들이 경쾌하게 부딪치는 소리 또한 중요하다. 재활용 파스타는 뜻밖에 엄청난 풍미를 냈다. 페페론치노를 욕심껏 넣어서 너무 맵긴 했지만.



생명수처럼 챙겨온 멸치액젓으로 완성한 내 인생 첫 김치. 처음엔 다들 비웃었지만 나중엔 고작 이만큼만 담근걸 눈물 흘리며 후회했다. 매끼니마다 김치 생각이 났다.



김장한 날엔 역시 라면과 수육이다. 라면은 아껴둔 신라면. 라면에 계란을 넣는가 마는가로 에디터M과 설전을 벌였지만, 김치를 만든 공을 인정받아 내 뜻대로 계란을 넣을 수 있었다.



<어차피 일할 거라면> 영상을 보신 분들은 ‘정육점 다녀온 썰’도 이미 알고 계시리라. 그렇다. 손짓, 발짓, 구글 번역기짓(?)도 모자라 에디터M이 입으로 ‘치이이익’ 소리를 내며 소고기 굽는 소리를 구현했건만! 아저씨는 알았다고 “Sim, Sim” 답하시곤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위의 돼지고기를 내어주셨다. 미처 소고기 스테이크로 진화하지 못한 돼지는 고기를 사랑하는 막내의 부름을 받아 김장날 훌륭한 수육이 된다.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넣고 샐러드처럼 버무렸다. 이건 에디터M의 솜씨 꿀맛.



열무인지 아닌지 아직도 확신할 수 없는 알싸한 채소로 열무김치도 담갔더랬다. 포르투 최고의 요리는 반숙 계란 후라이 하나와 고추장, 열무김치를 얹어 무심하게 비벼 먹는 열무 비빔밥. 아침밥으로 혼자 먹고 있는데 안 먹겠다던 에디터M이 와서 입맛을 다신다. 자기도 한 그릇 비벼달라는 신호다. 하여튼 먹으랄 때 안 먹고, 나중에 밥 찾는 딸래미들은 혼나야 한다.



너무 한식만 해 먹은 것 같으니 구색을 갖추기 위해 양식 한 상도 차려본다. 고든 램지의 스테이크 굽기 영상을 세 번 반복해 시청한 뒤 구운 스테이크다. 맛의 비결은 마늘향과 버터. 역시 정육점 아저씨와의 의사소통에 실패해서 스테이크라기엔 너무 얇은 고기를 받아왔다. 그래도 맛은 좋다.



스테이크를 굽고 남은 기름에 아스파라거스를 구우면 천국의 맛이 난다. 이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왜냐고? 밥 먹을 시간이 눈앞에 다가왔으니까.



고기엔 레드와인이라 배웠다. 그래서 레드 와인으로 만든 상그리아를 곁들였다. 사과와 살구를 송송 썰어 넣어 만들었다. 고기 한 입, 앙! 상그리아 한 모금, 우왕!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한 상.



이 새빨간 국물은 야심차게 준비한 메뉴. 짬뽕 파스타다. 고춧가루와 마늘을 달달 볶아 불맛을 내고, 통 베이컨도 함께 볶아준다. 국물은 꼴뚜기와 조개를 원 없이 넣어서 진하게 우려냈다. 너무 맛있어서 코박고 먹었다. 빨간 국물에 집착하는 건 빨간 피가 흐르기 때문이라며 헛소리를 해보고. 이 날은 에디터M이 한국에서부터 곱게 모셔온 문배술을 오픈했다. 역시 궁합이 좋더라. 물론 와인도 마셨다. 그건 그거대로 궁합이 좋았다.


숨은 동네 맛집이나 근사한 레스토랑을 탐방하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집에서 먹는 밥도 참 좋았다. 셋이 테라스에 모여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와인을 한 병 더 따면서 찬장에 모셔둔 과자도 뜯고, 빵에 치즈도 바르고. 싼 물가와 고삐 풀린 마음 덕분에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는 하루도 빈궁한 날이 없었다.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잔을 부딪칠 때마다 우리는 부자였다.



사실은 더 많은 요리를 해 먹었는데 사진으로 일일이 남겨두지 않아 아쉽다. 마지막은 디저트. 막내 에디터가 딸기 우유라고 굳게 믿고 귀여운 음료수를 사왔는데, 한 입 시원하게 마셨더니 걸쭉한 휘핑크림이었던 것. 그 사실이 너무 웃겨서 자지러지게 웃고 거품기를 찾아서 생크림을 잔뜩 만들었다. 식빵위에 잼을 바르고, 크림을 잔뜩 올리고, 과일과 초콜릿을 뿌려 얌냠. 커피에 크림을 잔뜩 올려서 또 얌냠. 실수로 샀는데 운명같은 맛이었다.



먹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찾으며 배부른 기억을 되새겨보니 다시 행복해진다. 처연하게 눈물 빼며 양파를 썰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H식당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전혀 포르투답지 않은 메뉴밖에 없었지만, 이 여자들이 정말 잘 먹고 지내는구나 하고 생각해주시길. 모두의 풍족한 냉장고를 기원하면서, Tchau.


*이번 에세이 제목은 ‘들깨이빨’ 작가가 그린 동명의 웹툰에서 따왔습니다.



* 요리하고 여행하고 일하는 세 여자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영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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