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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May 15. 2019

키치함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키치(Kitsch)

키치. 에디터M과 내가 정말 많이 쓰는 단어다. 정신을 차리니까 그렇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키치한 것들을 만나면 키치하다는 말 외에는 키치함을 표현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키치한 게 대체 뭐냐고? 느낌적인 느낌은 알겠으나 정확히 설명하라고 하면 눈동자가 허공을 향하고, 혀끝이 배배 꼬인다.


키치(Kitsch). 지금은 하나의 스타일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지만, 19세기 뮌헨에서는 조악한 싸구려 예술품을 일컫는 용어였다더라. 당시 뮌헨에서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예술품의 모작이라고 할 만한 싸구려 그림을 팔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유래되어 ‘싸고 저급한 예술품’을 뜻하는 속어로 쓰였다. 긁어 모으다라는 뜻의 독일어 ‘Kitschen’과 저급하게 만들다, 헐값으로 팔다라는 뜻의 ‘verkitschen’에서 따왔다고 한다. 산업혁명 이후 신흥부자로 떠오른 부르주아들이 그럴싸한 모조 예술품을 향유하던 것을 비꼬는 용어기도 했다. 아마 귀족 혹은 엘리트 계급이라 칭할 만한 자들이 “감히 네 놈들이 예술을 우습게 봐? 이 키치한 것들이…!”하고 사용했겠지. 저급한 대중적 취향의 B급 문화를 지칭하는 단어인 동시에, 소수에게만 허락됐던 예술품이 대중의 것으로 대량 생산되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네 여러분 구찌입니다]


하지만 2019년의 키치함은 더 이상 싸구려 짝퉁 예술품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B급 정서를 표방하는 영리함을 키치함이라고 본다. ‘키치’를 문화적, 스타일적인 장치로 활용한다는 이야기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캠벨 스프 통조림을 그려놓고 작품이라고 말했던 앤디 워홀의 팝아트야말로 ‘키치’를 의도적인 장치로 잘 사용한 예가 아닐까.


[네 여러분 구찌입니다2]


요즘의 우리가 흔히 키치하다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가볍다. 속된 말로 ‘진지 빨지 않는’ 스타일이다. 일부러 조악한 이미지나 통속적인 상징을 사용하기도 한다. 흔히 ‘병맛’이라고 표현하는 B급 코드와도 맞닿아 있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카피인지의 경계마저 흐릿해진다. 피식, 한 번 웃을 수 없는 유머와 위트는 덤이다. 이런 요소들을 솜씨좋게 버무려서 유치하지만 세련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네 여러분 구찌입니다3]


심지어 소위 ‘명품’이라고 부르는 럭셔리 브랜드들도 키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구찌다. 구찌의 2017년 캠페인이나 2018년 캠페인 컷을 보면 키치가 무엇인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 저게 바로 키치 그 자체입니다.


[샤넬 – 퍼렐 캡슐 콜렉션도 키치 그 자체

19세기엔 가짜가 진짜인 척하는 걸 키치라고 불렀는데, 21세기엔 진짜가 가짜인 척 하는 걸 키치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걸 힙하다고 부른다. 사실은 요즘 몹시 남발하고 있는 는 힙(hip)이라는 단어 역시 하위문화에서 시작된 표현이다. 참으로 재밌는 일이다. 맞다. 키치는 결국 재미있어야 한다. 나는 패션 전문가도 문화 평론가도 아니다. 나의 직업은 소비 요정.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요컨대 이거다. 우리는 오늘 키치를 배웠다. 그러니 키치를 소비하러 떠나보자. 



SELETTI


키치한 아이템을 소개하기로 마음먹고 제일 먼저 리스트업한 브랜드다. 셀레티는 이탈리아의 리빙 브랜드다. 위트있고, 과감하며, 괴짜 같은 디자인을 선보인다. 점잖은 인테리어를 원한다면 관심조차 두지 않겠지만, 독특한 걸 찾고 있었다면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처음 본 셀레티의 제품은 바로 폴딩 체어. 가볍게 접어서 보관해둘 수 있는 철제 간이 의자 말이다. 압구정 갤러리아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반해버렸다. 프린트가 정말 유니크했다. 계란 후라이나 핫도그, 볼드한 입술 마크가 인쇄된 폴딩 체어를 만지작거리며 이거야말로 우리 사무실 인테리어에 힙함을 더해줄 양념이라고 확신했다. 아쉽게도 의자 하나에 12만 원이 넘는 가격을 보고 포기해야 했다. 에디터M이 허락할 리 없었다.



셀레티는 다양한 브랜드와 콜라보를 선보이곤 하는데, 이 폴딩 체어는 STUDIO JOB과 협업한 BLOW라는 콜렉션 중 하나다. 홈페이지에는 <블로우 by 잡>이라고 쓰여 있다. by를 절대 빼놓지 말자. 이 네이밍마저 발칙하고 키치하다.



블로우 콜렉션을 몇 개 더 보여드리겠다. 이건 핫도그 소파와 버거 체어. 국내에선 최소 500만 원대부터 판매되더라. 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나나 램프다. 국내에선 30만 원대에 판매 중.



가장 유명한 건 셀레티와 매거진 토일렛 페이퍼의 콜라보레이션. 빨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앞니에 SHIT이라고 적혀있는 이미지는 어쩌면 익숙하실지도. 우산과 문구류, 접시, 가구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었는데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SECOND LAB


세컨랩의 러그가 갖고 싶어서 눈독 들인 지 오래됐는데 도무지 깔아둘 곳이 없다. 사무실에 깔았다간 일주일도 못 가 걸레짝이 될 것이 뻔하다. 엉엉. 세컨랩이라는 이름은 중고를 뜻하는 SECOND HANDS와 LABORATORY의 합성어다. 미국의 기념품샵에 있을 법한 빈티지하고 상징적인 이미지를 재해석해서 새롭게 만든다. 지극히 미국스럽지만, 놀랍게도 일본 브랜드다.

에르메스를 연상케 하는 오렌지색 러그에는 뉴욕, 할렘이라고 써있다.

실눈 뜨고 보면 파타고니아인줄 알았겠지. 역시 뉴욕이다. 깔깔.

이번엔 티파니앤코? 아니, 뉴욕이라니까. 세 가지 러그 모두 하우디에서 14만 2,000원에 판매 중. 세컨랩의 러그는 모두 일본에서 수작업으로 제작돼 마감이 깔끔하고 품질이 뛰어나다.


[사진출처 = thehowdy.ssg.com]


내가 탐냈던 건 공식 사이트에서도 품절 상태인 스마일 러그. 내가 본래 스마일 그림만 보면 갖고 싶어 하는 버릇이 있다. 이건 스마일이 너무 탐스럽지 않나? 내가 스마일 덕후라 좀 아는데 입모양과 눈모양이 저렇게 잘 빠지기가 쉽지 않다! 가격은 28만 9,000원. 엉엉. 웃을 수가 없어.




ANYA HINDMARCH



발음하기도 힘든 영국의 디자이너 브랜드, 안야 힌드마치. 국내에서는 윙크하는 스마일 토트백으로 유명하다. 사실 내가 저게 갖고 싶어서 헤매고 있는데, 재고가 없다. 또 스마일이냐고? 내가 아까 말했잖아요. 덕후라고….



다양한 액세서리를 팔지만 메인 제품은 가방이다. 남성용 여성용을 모두 판매하며, 의외로 심플한 디자인도 많다. 처음에 유명세를 얻은 건 몇 년 전에 선보였던 ‘켈로그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패션의 시야로 재해석하면 특별하고 재밌어진다”는 것이 디자이너인 안야 힌드마치의 신조다.


[맥북에 붙이면 딱이다]


2017년엔 소비자의 취향대로 조합해서 핸드백을 만들 수 있는 빌드어백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가죽 스티커를 판매해서 심플한 아이템을 마음껏 커스텀할 수 있다. 에그, 빅토리, 스마일리, 레인보우 등 이모지를 연상케 하는 귀여운 스티커가 많은 편. 가격대도 높지 않다.



MOSCHINO


[너무 갖고 싶어서 병날 뻔 했던 케이스]


사실 명품 브랜드는 제외하려고 했지만 모스키노만큼 키치함을 잘 아는 브랜드가 없는 걸! 2014년이었나, 모스키노가 맥도날드를 패러디한 제품을 냈을 때 정말 입을 떡 벌렸던 경험이 있다. 맥도날드의 M을 모스키노의 M으로 대치한 위트는 정말 대단했다. 프렌치프라이를 닮은 가방과 아이폰 케이스는 키치의 교과서로 봐도 무방하겠다.



최근엔 모스키노 테디베어를 팝아트적 요소로 활용한 컬렉션을 계속 출시하고 있는데, 대량생산되는 곰돌이의 귀여움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달까. 나 역시 모스키노 테디베어가 그려진 아이폰 케이스를 사서 쓴 적이 있다.


[방향제처럼 생긴 향수라니 키치해!!]


가방, 옷, 우산 어떤 아이템이든 모스키노스럽게 갖고 노는 모습이 재밌다.


[뭐가 진짜인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진지할 필요 없잖아? 재밌으면 되잖아? 라고 외치는 악동 같지. 이렇게 마음대로 갖고 놀아 놓고 가격만 진지한 모습을 보면 악당 같기도 하고. 



충격적이었지만 묘하게 아름다웠던 모스키노의 2018 캠페인컷을 마지막 짤로 남긴다.




JEFF KOONS



키치의 제왕이라 불리는 현대 미술가 제프 쿤스.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은 한 번쯤 보신 적이 있으리라. 돌잔치에서 풍선을 꼬아 만든 것 같은 강아지 모양의 조형물 말이다. 실제로 이 작품의 제목은 ‘풍선 개(Balloon Dog)’다. 진짜 풍선은 아니고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조각품이지만 표면을 매끈하게 처리해 풍선 같은 광택을 표현했다.

엄청나게 유명한 동시에 엄청난 문제아다. 자신의 성행위를 묘사한 조각을 선보여 예술계의 외면을 받기도 했고, 지금도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하위문화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며 이슈를 몰고 다니는 스타 작가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이 한화로 1000억이 넘는 가격에 낙찰되기 전까지는, 제프 쿤스의 풍선 개가 생존 작가의 작품 중 최고 낙찰가를 기록하기도 했을 정도다. 놀라지 마시길. 저 강아지 모양의 풍선 조형물이 무려 5840만 달러에 팔렸었다. 지금 환율로 따지면 690억 정도 되겠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하는 콜렉션이지만 명화를 활용한 루이비통과의 콜라보레이션 역시 크게 화제가 됐었다.



그의 장난감 같은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면, 키치함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무게 잡을 것 없이, 한없이 가볍고 가볍게. 훨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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