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리뷰를 가장한 여름날의 일기
당신에게 2016년 여름은 어떤 계절이었을까. 올여름은 더웠다. 33일의 열대야가 이어졌고, 우리는 “안녕”이라는 말 대신 “더워”라고 안부를 전했다. 사실 실제로 말할 땐 그 앞에 육두문자가 붙기 일쑤였지만, 내 소셜 포지션을 생각해 생략한다.
처음 ‘디 에디트’를 준비하며 독립을 선언했을 때, 내 주변의 상냥한 오빠들은 말했다. “바깥세상은 춥다”라고. 거짓말이었다. 바깥 세상은 더웠다. 사무실에만 처박혀 냉방 여름을 보내던 나는 여름이 얼마나 더운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얄궂게도 낮 기온 35도를 훌쩍 넘기는 날만 골라 야외촬영을 했다. 하얗던 에디터M과 나의 얼굴은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다. 벌칙 같은 날씨가 이어졌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렸다. 더 버틸 수 없겠다고 생각할 때쯤에야 여름이 등을 돌렸다. 지긋지긋한 Fucking summer가 지났다.
여러 가지가 바뀌어 있었다. 우리의 어여쁜 웹사이트엔 매일 찾아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툭하면 웹트래픽 용량을 초과하는 바람에 즐거운 비명을 내지르게 됐다. 예전엔 아무도 우리글을 읽어주지 않을까봐 걱정했는데, 이젠 서버 이전을 걱정해야하니 많이 컸다. 나중엔 무엇이 될까 우리끼리 건방진 소리를 하며 괜히 낄낄 웃는다. 물론 갈 길은 한참 멀고, 먹고 살 걱정은 여전히 우리 통장 잔고를 압박하지만. 괜찮다. 걱정 없는 삶은 싱거우니까. 가끔씩 이전 직장부터 우리 글을 읽어왔다며 다정한 이메일을 보내주는 분들도 있다. 깊게 감사드린다. 그런 메일은 서너 번씩 다시 읽는다.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지금쯤 대체 이 글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하실 분들도 있겠지. 이 글은 지독하게 더웠던 여름에 대한 작별 인사이자, 내 사소한 일기고, 놀랍게도 맥주 리뷰다.
7월 마지막 토요일이었을 것이다. 덥기도 덥지만 습했다. 물속을 헤엄치는 것 같은 날씨였는데도, 한강 맥주를 외치며 패기 돋게 촬영을 나섰다. 촬영을 도와준 C는 마신 맥주보다 흘린 땀이 많다고 투덜댔다. 더위를 심하게 먹어서 그다음 하루를 앓아누웠다. 그 뒤론 한강 사진만 봐도 신물이 나더라. 그래서 여태 기사를 쓰지 않고 묵혀두게 됐다. 이제 가을이 코 앞이다. 나의 한강 맥주 리뷰가 세상 빛을 볼 때가 되었다.
그날 둘이서 한강에 돗자리 깔고 앉아 마신 맥주는 도합 11병. 그중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상큼한 맥주로 3종을 골라 소개한다. 여담인데, 시원하게 마시겠다고 유난을 떠느라 얼음값이 맥주값만큼 더 들었다.
이것은 이제 흔한 대만 망고 맥주. 달고 맛있다. 풍미나 향을 기대하면 실망할지도. 가벼운 탄산과 혀끝을 얄팍하게 자극하는 단맛에 쭉쭉 들어간다. 안주가 필요 없는 맛. 물 대신 마실 수도 있겠다.
스페인 맥주라는 설명에 낼름 집어온 1906. 그날 한강에서 처음 마셔봤는데, 홀랑 반해버렸다. 라거의 청량감과 바이젠의 캐러멜 향이 함께 느껴진다. 풍미는 충분하지만 향이 거북할 정돈 아니다. 끝맛은 적당히 쓰고 구수한 맛도 강하다. 정체가 뭔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는데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조화롭다. 이제서야 처음 먹어본 게 속 쓰릴 정도. 그 뒤로 나와 1906의 연애는 시작됐다. 보일 때마다 사서 자주 마신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맥주는 리프만 프루트제라는 벨기에 맥주다. 체리와 라즈베리가 들어가 섹시한 붉은빛이 감돈다. 보틀 라벨부터 마음이 끌리더라. 어쩐지 와인 같기도 하고. 너무 단맛이 날까봐 걱정하면서 마셔봤는데, 아, 대박. 정확히 내 스타일이다. 루비색 음료가 목구멍을 타고 꿀꺽 넘어가며 가벼운 탄산을 뿜어낸다. 향긋하고 쌉싸름하다. 의외로 별로 달지 않다. 새콤한 맛과 우아한 기포 덕에 와인이나 샴페인을 연상케 하는 맛이다. 용량이 너무 적어서 아쉬웠을 정도. 글을 쓰다 보니 입에 침이 고인다. 당장 마시러 가보시길. 아쉽게도 파는 곳을 자주 못봤다.
날씨는 흉악해도 맥주 맛은 근사했다. 안주로 한강 별미인 자판기 라면도 호로록 먹었지. 한강은 역시 라맥이야.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다. 지독한 날씨에 혀를 내두른 게 엊그제인데, 서늘해지고 나니 괜히 또 지나간 여름이 아쉽다.
미안해 여름아. 내가 많이 못 놀아줬지? 하지만 우린 이미 지난 여러 해 동안 방탕하고 못되게 놀았잖아? 올해는 이렇게 작별하자. 굿바이. 또 봐. 그리고 여러분의 여름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