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3일의 기록
1.
"__님, 이거 좋으세요?"
"아뇨."
"왜 싫으세요?ㅠㅠ"
"싫다고 한 적 없는데요."
"???"
"좋은 게 아니면 싫은 거예요?"
나의 생각을 바꿔놓은 짧은 대화였다. 위와 같은 대화를 (같은 사람과) 자주 나눈 이후, 나의 사고 체계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좋거나 싫거나', '쉽거나 어렵거나', '밝거나 어둡거나' 꽤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두 개념 사이에 촘촘하게 들어차 있는 수많은 개념들, 혹은 제 3의 개념을 잘 생각해내지 못했다. 농담을 할 때만 그런 줄 알았는데,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제대로 하거나 그만두거나. 그 사이는 없었다.
이 고민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더니,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제 만난 어떤 친구는 아버지께서 "너무 어렵게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반말을 썼더니 "쉽게 대하진 말라"고 말씀하셨다며 아버지가 이상한 것 같다고 했다. 근데 또 어떻게 보면 "어렵게 대하지 말라"고 하셨지 "쉽게 대하라"고 하신 적은 없으니, 틀린 말씀은 아니다.
좋지 않다의 동의어는 싫다가 아니고,
쉽지 않다의 동의어는 어렵다가 아니다.
그리고 해를 가하지 않는다의 동의어는 해를 입는다가 아니다.
2.
이분법적 사고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스스로가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깨닫기 어려울만큼 자동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이분법적 사고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는 더 나은 선택지를 상상하기 힘들게 만든다. '더 나은 선택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선택지를 상상하는 것' 자체를 떠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변화를 위해선 그 관성부터 깨야 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 작가는 '혐오하거나 혐오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성을 혐오하거나 남성을 혐오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선택지, 새로운 삶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거꾸로 뒤집는 이분법적 논리의 재설정이 결코 아닙니다."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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