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따스함이 선물한 여행의 특별함
2002년 한일 월드컵 열기로 가득했을 때, 저는 캐나다 토론토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남역 거리에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응원가를 부르지는 못했지만, 캐나다 토론토의 코리아 타운과 식당에서 밤새 응원하며 함께 했습니다.
이탈리아와 한국의 16강 경기가 열리던 그날 밤(한국과의 시차가 있어서, 늘 새벽에 경기를 봐야 했습니다.) '홈스테이 마미'인 하숙집 주인 Zellar는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만약, 한국이 축구 경기에서 이긴다면,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해줄게. 응원 잘하고 와."라고요. 이탈리아 국기가 가득한 마을에서 그녀는 집 앞에 작은 태극기까지 달아주었습니다. 그날 밤, 한국이 이탈리아에 이겨 8강에 진출하였고, 저는 태극기를 휘날리며 홈스테이로 돌아왔습니다. 비록 문 앞에 걸어둔 태극기가 어느새 사라졌지만, 홈스테이 마미는 주말에 바비큐 파티를 열고 함께 축하해 주었습니다.
홈스테이 옆집에는 하얀 눈썹과 불룩 나온 배가 귀여운 웃음이 따뜻한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 집 차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할아버지는 큰 오크통 속에 들어가 포도를 발로 꾹꾹 밟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직접 '홈메이드 와인'을 만든다고 합니다. 신기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나를 할아버지는 오크통 안으로 불렀습니다. 보라색 포도가 가득한 오크통에서 포도를 밟으며 느낀 말캉한 촉감과 달콤한 포도향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그날은 보라색 포도향에 취한 듯 하루가 온통 보랏으로 가득하고, 윤슬과 같이 반짝이는 햇살이 뿌려진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할아버지는 제게 작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서툴지만 정성껏 포장한 포장지를 열어보니 작은 병에 들어 있는 와인입니다! "이건 더 스페셜한 '수연표 홈메이드 와인'이야." 며 안아주시던 할아버지. 공항에는 반입할 수가 없어, 한 병을 다 마셔버렸던 그 와인. 시간이 흘러도 보랏빛 향기와 할아버지의 미소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순간이 정말 좋습니다. 내 인생 아름다운 날들이 가슴 따뜻한 동화책으로 만들어지는 이 순간이요. 친구들이 2002년 월드컵 이야기를 하면 저는 바비큐 파티를 떠올립니다. 이탈리아 와인을 마실 때, 포도를 볼 때마다 할아버지가 생각나 그립고 만나고 싶습니다. 따스한 사람들이 선물해 준 추억은 파스텔톤 그림이 잔잔하게 그려진 동화책처럼 제 마음속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소중히 꽂혀 있습니다.
남편은 밴쿠버에서 어학연수를 했습니다. Judy의 홈스테이에 3개월 정도 살았지만, 한국에 와서도 매년 Judy의 생일을 축하를 하고, 크리스마스에는 서로 안부 인사를 물으며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습니다.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남편과 아이들과 다시 캐나다 밴쿠버에 왔고, 함께 Judy를 만나러 갔습니다. 이젠 80세가 넘은 Judy는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고 'Korean Son'이라 부르며 우리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때, 10살 어린이였던 Judy의 딸 Esther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Judy의 홈메이드 스파게티를 먹으며 함께 추억을 나누었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습니다. 저는 그리워만 했는데, 남편은 인연을 놓지 않았고 결국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 부럽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커서 어학연수를 다시 올 때까지 건강하게 계셔서 다시 또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이 우리 모두에게 만들어졌습니다.
밴쿠버 아일랜드의 '던컨(Duncan)'이라는 작은 마을은 다양한 색깔 문양, 동물이 있는 원주민의 토템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노란색 발바닥 모양을 따라가면 40개가 넘는 토템 폴(Totem Pole)을 다 볼 수 있는 'Totem Tour'로 흥미로운 곳이에요. 여행을 하고 기념품 가게에서 만난 주인아주머니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에 반가워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고, 김치를 좋아하신다는 아주머니는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도 주었습니다. 토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는 볼펜과 'Duncan'이 적힌 작 배지였어요. 배지를 아이의 옷에 달아주시면서 아주머님은 미소 지었습니다.
"던칸을 잊지 말아요. 꼭 다시 오세요"
짧은 말씀이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들의 따스함이 선물해 준 여행의 특별함.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아주 소중한 기억들은 '핵심 기억'으로 저장되어 하나의 섬을 만든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제 삶 속에서 캐나다는 늘 '핵심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홈스테이 마미의 바비큐 파티, 포도향 가득한 와인 만들기, Judy와의 인연, 던컨 아주머니의 미소. 이 순간들이 모여 제 마음속에 작은 '캐나다 섬'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에서 한 달 살기를 원했던 이유도 어쩌면 각자가 가진 그 따스한 추억이 담긴 '캐나다 섬'을 다시 찾고 싶었기 대문일 것입니다. Judy 할머니의 홈메이드 스파게티, 던컨 아주머니의 선물. 이번 여행으로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새로운 '캐나다 섬'이 생겼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아름다운 날들과 따뜻한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 따스함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아이들로 자라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삶이 보다 부드럽고 조금은 따뜻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