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이 지났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트 양쪽에 Eagle Wings Whale Tour가 적혀있고 범고래가 크게 그려진 노란색 보트를 타고 출발했을 땐 이렇게 오래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바다를 몇 시간이나 달려온다고도 상상하지 못했다. 고래를 내가 꼭 찾겠다는 의지로 내가 먼저 발견하겠다는 다짐으로 보트의 가장 앞에 앉았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 하늘의 옅은 파란색과 바다의 짙은 남색이 만나 세상은 가로로 길게 나누어져 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다는 거대하고 넓고 또 넓다. 우주가 이런 느낌일까. 짙은 남색의 바다 위를 별처럼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작은 조명처럼 온통 빛이 나는 햇빛을 넋을 놓고 보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캐나다 여행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엄마 아빠가 우리 가족이 함께 캐나다 여행을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도 늘 시큰둥했다. 다만 친구들에게 나도 해외여행을 자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4학년. 친구들은 방학이 끝나면 항상 스페인의 축구 경기장을 다녀오고, 미국의 야구장을 다녀왔다고 자랑을 했다. 비행기를 타고 간 여행은 제주도가 전부였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떤 자랑을 해야 친구들이 부러워할지를 고민했다. 엄마가 보여준 사진 한 장이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그래 이거다. 웨일와칭(Whale Watching) 고래 투어. 고래를 직접 보는 여행이라니 정말 칠(Chill)하게 멋졌다. 엄마가 보여준 기사에는 우리가 여행을 가는 캐나다 밴쿠버 아일랜드는 2월부터 10월까지 수천 마리의 고래가 이동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먹이를 기다리는 범고래를 만날 확률이 아주 높다고 했다. 아쿠아리움에서 본 그냥 그런 고래가 아니다. 무려 바다의 최고 포식자, 이름도 킬러. 범고래(Killer Whale, Orca)다. 검은색에 상처 난 듯 새겨진 뚜렷한 하얀 무늬와 칼날 같이 곧게 서있는 등 지느러미로 바다를 가르며 위엄 있게 헤엄치는 범고래. 그때부터 나는 고래 투어만을 기다렸다.
범고래는 캐나다 밴쿠버 공항에서부터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공항의 수많은 여행 책자에 범고래 사진이 수십 개가 있었다. 밴쿠버 아일랜드는 더했다. 빅토리아의 시내는 온통 범고래로 가득 차고도 넘쳤다. 건물의 벽화에도 범고래가 있었고, 기념품 가게에는 엽서, 달력, 머그컵, 티셔츠, 모자, 냉장고 자석을 비롯한 모든 것이 범고래였다. 나는 범고래가 가장 크게 그려진 머그컵을 하나 사며, 이런 곳에서는 분명 범고래가 바다에 넘칠 수뿐에 없다고 확신했다.
드디어 오늘. 온 가족이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범고래를 볼 확률이 높은 시간대에 대해 엄마와 아빠가 열띤 논의와 검색, chatGPT에까지 물어보았지만 정확한 답은 없었다. 아빠는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하며 아침 시간을 선택했다. 하지만, 난 범고래를 우리가 볼 것을 확신했다. 범고래를 만나 등에 타고 헤엄치는 꿈을 꿨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늘 꿈이 반대라고 한다. 난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믿는다. 이유야 어쨌든 난 혼자 이 꿈을 간직하기로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지.
차를 타고 가며 엄마 아빠는 고래 투어를 위한 플레이리스트라며, [고래 사냥]이라는 노래를 틀었다. 고래를 잡으로 동해바다로 갈 거라는 가사가 들린다. 동해 바다에도 고래가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연이어 나오는 노래는 [흰 수염고래]라고 한다. 아빠는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물까지 글썽인다. 흰 수염고래는 어떤 고래일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더니 블루웨일(Blue Whale), 지구에서 가장 큰 생명체라고 한다. 지난주에 Royal BC Museum 옆에 IMAX 영화관에서 블루웨일 3D영화로 보았을 땐, 정말 컸다. 같은 종류인가 보다. 그런데 흰 수염고래가 왜 슬프지? 잘 모르는 노래에 지겨워져 슬쩍 아이브 노래를 신청해 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단칼에 '고래'와 연결성이 없다며 반려했다. 남동생이 바다와 연결된다고 신청한 '문어의 꿈' 노래는 칼차단되었다. 잠이나 자야겠다.
마침내 보트에 탑승했다. 보트 가장 앞자리에 아빠랑 앉았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랑 동생은 안쪽 실내로 이동했고 동생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보트는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달리고 또 달린다. 바다는 보트와 부딪혀 큰 물결을 만들고 내 얼굴까지 날아온다. 보트가 달리며 흩뿌려진 주먹만 한 물방울이 내 눈과 얼굴에 계속 들이친다. 바다 한가운데를 거칠게 달려가는 보트 위에서 바다 바람을 끝도 없이 마주하니 온몸이 으슬으슬해진다. 하지만, 절대 실내로 들어갈 수 없다. 이 바다에서 나는 꼭 범고래를 찾아야 한다. 선장 아저씨가 찾으면 알려주시겠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먼저 찾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별이 쏟아진 듯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를 지나고 나서 얼마 뒤 안개가 뿌옇다. 온통 안개로 가득 차서,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순간, 보트가 속도를 줄이고 서서히 다가간다. 범고래가 있는 것일까?
“이 근처가 우리가 범고래를 자주 보았던 곳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 아침은 안개가 가득해서 시야가 좋지 않아 찾을 수가 없네요. 다음 스폿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아빠가 크루(Crew) 누나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며, 바다가 허락해야 '자연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보트는 잠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다시 속도를 내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나는 화가 났다. 긴장하며 기다린 2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고래를 이렇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찾는 것인가? 바다에 레이더를 쏘아서, 정확한 범고래의 위치를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닌가? 엄마도 매일매일 핸드폰으로 나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추적하는데, 이런 AI시대에 고래의 위치를 선장 아저씨의 감으로 찾아가야 하고 아빠의 말과 같이 모든 것을 하늘의 운에 맡겨야 하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심지어 엄마에 따르면 이 고래 투어는 4인 기준 625 CAD로 가격도 상당했다. 돈을 많이 받는 투어라면, 투자를 해서 최신식 장비로 음파 탐지기나 레이더로 정확하게 고래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곳에 가서, 보고 오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이렇게 답답하게 투어를 하는 거지?
그렇게 또 바다를 보트는 달린다. 바다의 차디찬 물이 폭포처럼 내 얼굴로 세차게 떨어진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아빠에게 불만을 이야기했다.
"아빠, 요즘엔 최첨단 장비가 많은데, 왜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고래를 찾아가야 하는 거야? 과학을 이용하면 되잖아. 난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데?
‘자연의 선물’ 말고, ‘과학의 선물’을 받으면 되는 거 아니야?"
“우진아, 소리와 청각을 사용하는 고래들에게 인공 음파와 같은 장비는 고래에게 큰 스트레스를 줄 수 있고, 청각 손상까지 가할 수 있어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아빠의 설명에 옆에 크루 누나가 추가로 말한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찾지 않고 관찰' 하는 투어예요. 우리의 선장 아저씨가 가진 많은 경험과 누적된 데이터, 무전 네트워크를 통해 자연스럽게 고래를 만날 수 있답니다. 특히, 오늘 함께하는 John 선장님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니 우리 한번 믿어 보아요.”
누나는 나에게 추우면 얼굴을 감싸라며 목도리를 주셨다. 아빠는 '자연의 선물'은 쉽게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기다려야 더 소중하게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딱히 방법도 없어 마냥 또 기다렸다.
잠시 뒤 다시 한번 더 엔진이 꺼졌다. 소리도 내지 않고 서서히 어딘가로 이동한다. 무언가 느낌이 좋다. 다들 숨소리도 내지 않고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크루 누나는 망원경을 들고 여기저기 찾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 바다 위에 뭔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Whale Tail!
엄마 옆에 있던 멕시코에서 여행 온 누나가 큰 소리로 소리치며 박수를 쳤다. 일제히, 모두가 바라본 곳에는 정말 큰 고래의 꼬리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와. 고래다! 드디어 고래를 만났다. '혹등고래(Humpback Whale)' 신비롭게 두 개로 갈라져 하트처럼 보이는 큰 고래의 꼬리가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고래 박사 같은 멕시코 누나가 'One, Two, Three, Four......' 숫자를 센다. 고래가 다시 올라오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시 바다에 보글거림이 보인다.
"와우"
보글거리던 바다에 물기둥이 세차게 올라간다. 고래가 뿜어낸 거대한 분수가 터지며 나는 소리는 천둥 같으면서도 묘하게 평화로웠다. 바닷속 무언가 큰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 느낌이다. 고래의 검은색 등이 솟아오르며 빛을 받아 매끈하게 반짝이며 둥글게 바다 위를 감싸내려간다. 5초 정도 뒤, 고래의 꼬리가 조금 더 높게 올라가며 햇살을 물결 위로 뿌렸다. 거대한 꼬리가 하늘을 스치고 다시 물속으로 철퍼덕한다. 옆에 있는 조금 작은 고래는 등과 꼬리를 한 번에 보여준다. 혹등고래의 꼬리는 사람의 지문과 같이 그 모양과 무늬 색이 다 다르다고 했다. 옆에 큰 고래의 꼬리와 작은 고래의 꼬리를 서로 비교해 보며 나도 슬며시 "웨일 테일"을 함께 외쳤다. 몸이 얼마나 큰 걸까? 바닷속에서 숨바꼭질하고 있는 혹등고래의 얼굴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고래 투어에서 바다사자, 물개도 보았지만, 가장 기대했던 범고래는 만나지 못했다. John 선장님의 집요함으로 평균 시간보다 1시간을 더 바다에 있었다고 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고래 투어를 마치고 괜히 화가 났다. 정말 엄마 말처럼 꿈은 반대인 걸까. '자연의 선물'을 받으려면 언제까지 얼마큼 기다려야 하는 걸까. 마음이 깊은 바다 저 밑까지 가라앉았다. 보트를 내려 기념사진도 찍고 싶지 않아, 괜히 심술을 냈다. 고래 투어 앞에 걸려있는 커다란 범고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밴쿠버 아일랜드의 마지막 날이다. 토피노를 여행하고 나나이모에서 이제 페리(Ferry)를 타고 밴쿠버로 다시 돌아간다. 범고래의 섬에서 범고래를 보지 못했다. 아직도 속상하다. 캐나다에서 기대하고 기다렸던 그 유일한 한 가지를 끝내 이룰 수 없었다.
"우진아, 밖에서 우리 바다를 보며 같이 한번 더 찾아볼까?"
"나 추워, 그냥 실내에 있을래"
경험 많은 John 선장님도 못 찾은 고래를 페리에서 볼 수 있다는 건 말이 안된다. 더구나 '우연히' 고래를 만나는 건 여러 이유로 과학적이지도 않다. 마음에는 허무함과 실망감만 남아 더 이상 바다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모르는 한숨이 나왔고 내 마음과 몸이 저 바다밑으로 자꾸만 잠겨간다.
그때, 페리에서 방송이 나왔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빠가 있는 갑판으로 벌떡 일어나 뛰쳐 나갔다.
"지금 바다에 고래가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선장님이 이야기했어."
아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고래가 있다고? 사람들이 갑판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고래를 찾던 아빠가 손가락으로 뭔가 몽글몽글하게 물결치는 바다를 가리켰다. 사람들의 시선도 아빠의 손끝을 따라갔고, 엄마는 카메라를 준비했다.
"범고래다!!!!!"
나는 정말 큰 소리로 소리쳤다. 약간의 거리가 있었지만 등 지느러미를 곧게 세운 검은색과 하얀 무늬가 뚜렷하게 보이는 범고래 세 마리가 헤엄치고 있다.
"Orca! Oh! Killer Whale"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함께 함성을 질렀다. 웃음이 절로 났다.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다 헤엄치는 범고래를 보며 나도 발을 동동 구르며 어깨를 들썩들썩했다. 내 마음은 바다 위로 떠올라, 하늘 높이 둥실 올라갔다. 초 흥분 상태. 사람들은 서로 함께 사진을 찍으며 믿을 수 없다며 함박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범고래를 보았다. 마법 같았다.
문득, 바다에서 고래를 만난다는 건 계획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이 허락해야만 가능한 우연하고도 짧은 만남.
그 설렘과 기쁨은 너무나 컸다. 범고래가 밴쿠버 아일랜드를 떠나는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나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안녕.
아빠가 말한, '자연의 선물'이 맞았다. 기다림 끝에 받은 선물은 너무나 소중했다. 그리고 그 순간의 햇살과 범고래의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오늘을 평생 기억할게 분명하다.
가슴에서 뭔가 뭉클한 것이 계속 몽글몽글 올라왔고 눈물이 몽글몽글 떨어졌다. 고래 투어에서 '과학의 선물'을 외치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이제 꿈이야기를 엄마에게 해도 되겠다. 나 때문이라고. 범고래를 만난 자연의 선물은 내 꿈 덕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