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빠나무 Oct 19. 2020

우리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떠오르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오시면 됩니다... 는 농담이고요.


요새 아이들이 유행처럼 하는 말 중에, '태어남 당했다.'라는 말이 있더군요. 


'흙수저라서 불행한, 앞으로도 더 힘들 것만 예상되는 삶이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주어졌다.'


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말이겠지요. 


이들은 삶이 고통이고, 그 고통을 이겨낼 힘이 본인에게는 없다고 느끼고 있겠지요. 


그러니 이런 고통을 준 부모를 원망하고 있겠고요. 


주로 만성 경증 우울이 반복되는 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태의 분들이 저에게 오면, 늘 물어봅니다. 왜 제가 살아야 하죠?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해보고 제가 내린 답은,


'딱히 이유가 없습니다.'였습니다.


왜 사냐는 질문의 끝은 자살입니다.


서양철학 쪽을 쭉~ 따져보면 예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해 살았는데, 모더니즘이 들어서면서 그런 가치가 해체되고... 그래서 근대 서양철학자 몇 명도 이런 결론에 도달해서 실제로 자살을 했고...


보니까 법륜스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더군요. 




그렇다고 명색이 정신과 의사인데, '자살이 답입니다.'라고 할 수도 없죠.


그래서 그냥 삶은, 고통은, 세상은 그냥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 독수리가 존재해요? 왜 세상은 원소로 이루어져 있죠? 이건 답이 없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왜 존재하냐는 질문도 답이 없겠지요. 




그러고 나서, 그 삶과 고통을 어떻게 '해석'해서 '의미부여'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알려드립니다. 


당신은 새로운 게임이 나왔을 때 적응하는 고통을 기꺼이 견딥니다. 왜? 적응하면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고통에 의미가 부여되었으니까. 


그런데 군대에 강제로 끌려가서 당하는 고통은 별게 아니어도 지겹게 크게 느껴집니다. 왜? 의미부여가 안되니까. 내가 이 고통을 당하는 의미를 모르겠으니까. 


이유를 따지는 것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려드립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자신에게 의미가 없으면 사소한 일이 되는 것이죠.


아르메니아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은 비극이지만, 한국에 사는 나에게는 의미 부여가 어려운 일이죠. 


그렇지만 아르메니아에 부모님이 이민 가서 살고 있다면, 나에게 의미가 부여되죠.




이걸 아주 폄하하는 말로 정리하면, 정신 승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정신승리하면서 사는 것에 의미부여가 안되면, 삶이 공허한 것이죠.


삶에 의미부여가 돼서 '나는 이게 좋아!' 하면서 살 수 있으면, 그게 될 때마다 즐겁겠죠. 


삶과 고통에 대한 다른 답은 아직 인류가 못 찾은 것 같아요.


아마 못 찾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의미부여를 잘하면서 살까를 고민해봅시다. 


추천 책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작가의 이전글 <논문 읽어주는 의사> 이불로 불면증 치료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