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순례자들 사이, 나의 정체성

프로미스타 -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

by 정한결

18km 밖에 되지 않았던 목적지 Carrión de los Condes(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

짧은 거리지만 선착순 알베르게를 목표로 했기에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물론 전날 알베르게 취소의 트라우마도 매우 크게 작용했다.


까미노 위에서 보는 일출은 적응이 안 되게 아름답다.

이 날은 큰 나무 덕분에 라이온킹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매일같이 사라지는 밤과 뜨는 해의 풍경인데 자연이 만든 그라데이션이 이렇게나 아름답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계속해서 2차선 도로가 펼쳐진 길이었다.

좁은 길인데 제한 속도가 90km여서 웃기면서 두려웠다.


속도는 잘 났고 9시 4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제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바에서 쉬며 아침 식사를 했다.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나오니 하늘이 쨍쨍했다.

엄청나게 맑았던 이 날의 하늘이 기억에 남는다.

지난 며칠간 비는 오지 않아도 하늘에 계속 구름이 가득했는데, 이 날은 포토샵을 한 것처럼 하늘이 텅 비었다.

‘하늘색’의 정의와 같은 하늘이었다.

어떻게 하늘이 이렇게 하늘색? 어떻게 sky가 이렇게 skyblue? 하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걷다가 카스트로헤리츠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보낸 한국인 부부를 다시 만났다.

40대 이상의 분들은 대부분 여행사를 끼고 오시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적은데, 이 두 분은 자유 까미노를 택하셔서 길 위에서 자주 만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그분들과 이야기를 하고 SY님이 세상에선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의 예시를 많이 본다면, 이 길 위에선 ’저렇게 되고 싶다‘의 예시를 많이 만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누군가에게 그런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아일랜드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고, 영어로 까미노의 전 세계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내가 그런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라는 엄청난 칭찬도 해주었다.


SY님은 나보다 두 살이 어렸는데, 27살의 나는 뭘 하고 있었나 생각해 보니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순례길에서 나를 정의하는 말, 사람들이 날 가장 높게 사는 부분은 ‘아일랜드 워킹홀리데이를 했다’는 점이었다.

2년 전만 해도 나에게 없었던 특징이었는데, 1년 만에 나를 보는 세상의 시선이 확 바뀌어 있었다.


남들보다 어린 27살의 나이에 까미노를 걷고 있다는 게 제일 대단하다고 SY님에게 말을 하다 이 점을 깨달아버렸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 같지만 1년은 나를 드러내는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얻은, 가장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이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어벙벙한 상태로 동네에 들어섰다.

성당 앞 집에 세탁한 사제복이 걸려있었다.

이보다 더 Camino스러운 풍경이 있을까!


11시 반부터 체크인을 시작했던 선착순 알베르게에 시간을 딱 맞추어 도착했다.

이 날은 JH님의 생일이었다.

체크인을 하시던 할머니가 중얼중얼 여권의 생년월일을 읊으시는데, 그걸 듣던 옆 사람들이 hoy(오늘)?이라고 되물었다.

그렇게 JH님은 처음 만난 순례자들에게 해피버스데이! 도 들었다.


우리 셋과, 걷는 길에 만났던 한국인 부부가 같은 방에 배치되었다.

이 알베르게가 유명한 이유는 모든 침대가 1층이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해 젊은 사람을 2층에 배치시키는 알베르게가 많기 때문에 거의 처음 경험하는 1층이었다.

이 정도 시설은 5성급이나 다름없다.


주방이 있는 알베르게여서 파스타를 해 먹었다.

정확히 말하면, 요리를 잘하는 생일자 JH님의 주도로 우리는 훌륭하게 조수 역할을 했다.

파스타와 미트볼과 스크램블에그를 만들고 있는데, 단체로 오신 한국인 순례자분들이 매우 큰 관심을 보이셨다.

젊은 사람들이라 신기한 음식을 해 먹는다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단체 순례자분들은 무려 백숙을 끓여 먹는 내공을 가지셨다.


미역국을 아주 좋아하는 나는 아일랜드 워홀을 떠날 때 동결건조 미역국을 챙겼었다.

남은 미역국을 까미노에 가져왔는데, 이게 생일자 덕분에 톡톡히 제 역할을 했다.


엄청난 양의 파스타와 미트볼과 계란까지.

셋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해치워버렸다.

사람들은 순례길을 걸으면 다이어트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매일같이 이렇게 먹어치우니 어림없다.


짧은 길을 이르게 시작해 이르게 마치니 남는 게 시간이었다.

연박과 피로로 인해 잔뜩 밀려버린 일기를 3시간 20분 걸려 모조리 썼다.

일기를 쓰는데 엄청나게 타버린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나에겐 까미노의 훈장과 같았던 새까맣게 타 버린 손.


숙제 같았던 일기를 마치고 노을까지 슬쩍 본 후 하루를 마감했다.

까미노 전우의 생일이 완벽해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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