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 - 모라티노스
18km의 평온한 길이었던 전날.
오늘의 목적지는 29km 떨어진 Moratinos(모라티노스).
거리 자체도 멀긴 하지만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17km의 평야 지대였다.
보통의 까미노는 5-6km마다 작은 동네가 있어 쉬어갈 수 있는데,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모라티노스로 가는 길엔 중간 지점 없는 17km의 평야 구간이 있다.
신체적으로는 힘들지 않지만 당연스럽게 너무나 지루한 길이기에, 마음의 길의 최대 고비라고 악명 높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날 아침엔 안개가 자욱했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채로 17km의 여정에 올랐다.
그리고 안개가 가득한 일출을 보았다.
유채꽃에 안개가 더해지니 거대한 거미줄이 걸린 것 같았다.
사방이 안개여서 가시거리가 엄청나게 짧았다.
중간에 쉼터나 푸드트럭은 있었지만 난 푸드트럭 말고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물을 마시지도 않았지만 화장실이 없다는 것에 불안해 마음이 급했다.
조금이라도 처지면 바로 지쳐버릴 것 같아서 노래를 들으며 텐션을 유지했다.
ABBA의 Don't Shut Me Down을 듣는데 마음이 마구 벅차올랐다.
여전히 이 노래를 들으면 안개 가득한 메세타 평원을 걷던 내가 생각난다.
같은 노래를 몇 번 반복해서 듣다 언제나 날 신나게 하는 ABBA 메들리를 들었다.
텐션을 유지하겠다는 발악이었다.
안개가 얼마나 심했는지 모자와 이어폰이 축축해질 정도였다.
배터리가 없어 막판엔 노래도 못 듣고 무작정 걸었다.
그러던 중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Kim 같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봤는데, 정말 그녀가 있었다.
이번엔 독일 쾰른에서 온 Christine이라는 분과 함께였다.
그분은 작년에 생장부터 프로미스타까지 걸었고, 올해 다시 프로미스타부터 까미노를 걷고 있다고 했다.
혼자 걸을 때 화장실이 가고 싶어 종종거렸는데, 대화를 시작하니 신경이 딴 데 쏠려서 화장실 생각도 없어졌다.
그렇게 셋이 대화를 나누며 17km 지점, 바에 도착했다.
무시무시한 소문에 비하면 나름 평탄하게 해냈다.
안개 때문에 길이 거의 안 보이는 수준이었는데, 그런 풍경이 생경해서 오히려 쉽게 걸어왔다.
목도 마르고 화장실도 가고 싶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물만 사 마시려고 했는데 엄청난 바나나케이크 비주얼에 속절없이 주문해 버렸다.
음식을 들고 나와보니 모든 사람이 바나나케이크를 하나씩 먹고 있어서 웃겼다.
평원에 제대로 들어서기 전에 헤어졌던 JH & SY님과 바에서 다시 만났다.
둘도 바나나케이크를 먹고 조금 더 쉰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안개가 걷히자마자 그랬던 적이 없었다는 듯 미친듯한 태양이 내리쬈다.
또다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색 하늘이었다.
전날과 다른 점이라면 날씨가 너무 더웠다.
이 날도 역시 길 곳곳 귀여운 포인트들이 가득했다.
순례길 위를 꾸미는 사람들과 그것들을 귀여워하는 사람들 모두가 소중하다.
이 날은 정말이지 기억에 남게 더운 날이었다.
앞으로 이렇게 더우면 어쩌지 걱정을 한가득 하며 걸었다.
덥고 힘들어서 짜증 난 와중에 '오늘 빨래 잘 마르겠다'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완벽한 순례자!
그리고 해가 가장 쨍쨍한 오후 2시 반 도착한 모라티노스!
나는 욕을 좀처럼 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 날 모라티노스 표지판을 보고 몇 개월, 혹은 몇 년 만에 육성으로 욕을 뱉었다.
그 정도로 너무 힘든 날이었다.
메세타 평원 별거 아니네? 하며 17km를 지났는데, 그 후의 여정이 후폭풍처럼 나를 덮쳤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말도 못 하게 빨갛게 익어 있었다.
모자 쓰고 선크림만 바르면 안 탈 줄 알았는데, 사방에서 해가 내리쬐니 별 수 없었다.
모라티노스는 아주 작은 마을이라 슈퍼나 식당이 없었다.
선택지 없이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menu del dia(오늘의 메뉴)를 신청했고 다른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 테이블은 한국인 6명, 대만인 2명, 대만 출신 미국인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인과 대만인들 사이에 앉아서 한국어와 영어로 이 그룹 저 그룹 정신없이 떠들었다.
저녁은 대형 파스타, 감자튀김, 목살구이, 아이스크림에 전통 리큐어까지 아주 훌륭했다.
힘들다는 걸 핑계로 무지막지하게 먹었다.
모라티노스엔 유명한 언덕이 있다.
운 좋게 내가 묵었던 알베르게 바로 앞에 그 언덕이 있었고, 해 질 녘에 노을을 보러 올라갔다.
나는 노을만큼이나 노을을 보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런 풍경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고 있으면 이게 삶의 행복이지 싶다.
해가 지고는 바로 알베르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치는 하루였지만 완벽한 노을로 마무리할 수 있어 결론적으로는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