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낳기 위해 강의 흐름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자기소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많고 그 이유도 가지각색이겠지만 나에게는 "00 학교", "00 학과", "00 회사", "00 업무"라는 말로 나를 소개하는 것이 늘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실 첫 주자가 "00 회사 다니는 000입니다."라고 시작해 버리면 다음 사람도 그다음 사람도 문장의 패턴을 이어받아야 하니까. 어느 곳에서도 딱히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런 곳을 나의 정체성으로 설명하는 데에서 오는 일종의 괴리가 있었다.
비교적 나와 비슷한 배경의 사람들을 마주할 확률이 높은, 또는 아직 '나'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이라 조금 더 유연한 사고가 가능했던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친구들이 해보는 것들은 나도 꼭 해보았고 때로는 내가 시작한 것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기도 했다. 우정 일기를 쓴다거나, 피부톤을 보정해 주는 선크림을 바른다거나, 학교 앞 분식집에 가면 김말이 튀김을 꼭 시킨다거나, 그런 소소한 것들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여러 친구들을 사귀기보다 소수의 친구들과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이 대학생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누렸던 것 같다. 가정, 학교, 직장에서는 좋든 싫든 지속적으로 보고 잘 지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학에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는 보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
나는 여대에 진학했는데 신기하게도 대학교는 누구도 소속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소속감을 가지게 된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나의 대학교는 혼자라는 게 이상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혼자 수업을 듣거나 공부를 하거나 밥을 먹어도 주변에는 늘 '벗'이라고 부르는, 선을 넘지 않는 유의미한 타인이 존재했다. 언젠가는 화장실에 간 사이 동기가 내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간 적이 있는데 "앞에 앉은 벗인데요."라고 시작하는, 누군가 나의 물건을 훔쳐간 것이 아닌지를 우려하는 포스트잇 쪽지가 있었고, 언젠가는 김밥을 먹고 있는데 내가 낀 렌즈가 예쁘다며 어느 제품인지 물어보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 학교 내의 식당에서는 합석을 하는 일이 워낙 많고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물론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용건이 끝나면 빠르게 각자의 식사와 세계로 돌아갔다. - 졸업한 지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대학교를 생각하면 소파가 있다면 어디든 누워있는 사람들과 이 수업에서는 이 언니, 저 수업에서는 저 언니가 찰떡같은 스타일링으로 개성을 뽐내고 있어 팬심을 자극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 어쩌면 나랑 동갑이거나 동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멋있으면 다 언니다. -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해도 자꾸만 빙빙 겉돈다는 느낌은 대학교를 벗어나고부터는 늘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대부분의 선생님들을 좋아했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는데도 종종 10명 남짓한 선생님들과 함께 있는 교무실이 답답해지곤 했다. 특히 모의고사 날이면 당일날 문제를 풀어보고 아이들에게 난이도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고 싶었는데, 교무실에 있다 보면 어김없이 대화가 시작되고 공강 시간이 끝나곤 했다. 그래서 꽤 자주 할 일을 가지고 나와 빈 교실이나 상담실에서 혼자 문제를 풀거나 업무를 했고,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나를 발견하면 꼭 학교 생활이 힘드냐는 우려 섞인 질문을 건네곤 했다.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느껴질까 봐 얼른 교무실로 복귀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연기를 하곤 했지만 친한 선생님들과 사적인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에서도 우리는 참 다른 사람이구나, 종종 깨닫고 생각할 만큼 혼자라고 느끼는 시간도 많았다. 다수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면 나만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기도 하니까.
같은 집단에 속해야만 같은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한여름에 부산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직전에 친구의 검색 덕분에 만족스러운 속초 여행을 다녀온지라 부산 여행 브이로그를 몇 편 시청하며 여행 계획을 세우고자 했다. 그런데 서너 편을 보고 나니 "어, 아까 거기 아닌가?" 하는 느낌이 반복되었다. 화면을 끌 때쯤에는 부산까지 갔으면 먹어야 하는 것과 마셔야 하는 것, 가봐야 하는 곳이 천편일률적으로 이미 정해진 느낌이었다. '별거 없어 보이는데, 이 소품샵은 왜 다들 꼭 들리지?' 하는 의문과 호기심이 동시에 생겼다. 그러나 내 고향 서울이 그렇듯, 부산처럼 큰 도시에 가면 개성과 취향에 따라 먹고 마시고 할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꼭 대세를 따르기 위해 뙤약볕에 긴 줄을 서고 땀을 흘릴 필요는 없으니 역시 예상치 못한 곳들을 방문하는 걸로 나의 여행은 끝났다. 생각해 보면 조금 걷다가 발에 걸리는 식당에서 밥을 먹어볼 수도,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혹시 모를 실패를 감당할 만한 약간의 마음의 여유도 없어 다수를 따라가고 싶었던 건 아닐까. 마치 다수의 선택이 안전한 선택이라는 듯.
몇 년 전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인기를 얻은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 칼국수 하나!" 외치고 아무 대답이 없자 "칼국수 집이 아닌가..." 중얼거리며 문을 나서는 아저씨 이야기다. 실은 같은 건물 2층에 위치한 칼국수 집으로 착각하고 카페에 들어온 아저씨의 일화로 가끔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그저 잘못된 곳에서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칼국수 집에서는 칼국수를, 카페에서는 음료와 디저트만 만들어주니 맛있는 건데.
인싸의 세상에서 당신만이 아싸라고 느껴진다면 내가 있는 장소가 나에게 맞는 장소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관습에 따르는 학교에 속하지 못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처럼. 어쩐지 이전의 삶은 내가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따라왔다면 학교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또 아무리 나를 주어진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해도 숨길 수 없이 튀어나오는 부분이 남아있다 누군가를 거슬리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꼭 주류에 속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들에게는 맛있는 두바이 초콜릿이 내 입맛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조금 다른 길을 가도 된다. "내향성은 위대한 기질"이라는 수전 케인의 말처럼, 한 끗 차이이지만 아싸가 아닌 '자발적 아싸'로서 나를 조금 더 긍정해 보는 것은 어떨까. 외톨이는 아니되 종종 혼자가 되는 순간들을 즐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