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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나 Sep 11. 2024

취향

강요하지 않고 향유하는 나만의 색깔

"CD 끝나가서 음악 바꾸려고 하는데. 뭐 좋아하는 장르 있어요?" DJ이기도 한 북카페 주인장이 물었다.

"재즈요!" 소심하게 대답하자 이내 쳇 베이커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실 명반이라고 알려진 음악이 듣기 쉽지는 않죠. 베토벤 틀어주고 '좋지?' 물어보면 누가 '아니!'하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겠어요. 그건 질문이 아니라 강요에 가깝지."


학부 시절 취향이 잘 맞는 동기와 브런치, 전시회, 책방, 카페를 자주 다녔다. 그 시절 우리가 자주 드나들었던 북카페를 처음 방문한 날 아마도 사장님과 우리는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조각글을 남기곤 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에 기록을 남겼었다. 사람들이 와서 책 읽고 공부하고 이야기 나누는 배경에 나오기엔 부담스럽지 않을까 하는 배려로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음악은 한편에 미뤄둔 채 듣기 편한 피아노나 첼로 음악을 즐겨 틀어주시는 사장님의 모습. 책장 한 면이 모두 CD와 LP였는데 내가 그만큼 음악을 듣고 잘 알았다면 사장님처럼 절제할 줄 알았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 늘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뚜렷한 취향 속에서도 타인을 배려하는 철학을 품고 있다는 확신. 지금도 내 방에는 턴테이블과 쳇 베이커의 LP가 놓여 있고 언젠가 함께 사는 사람이 생긴다면 고단한 하루 끝에 쳇 베이커의 음악을 배경으로 블루스를 추는 꿈을 꾼다. 아마 멋지다고 생각한 사장님이 내 취향을 한 꺼풀 쌓아주신 거나 다름없다.


교사는 학생들이 바쁠 때 약간의 여유가 생긴다. 타과목 시험날에 연수나 밀린 행정 업무가 없다면 조퇴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귀한 평일 낮의 시간이 생기면 고향인 서울로 나들이를 가곤 했다. 작년에는 핸드드립 원데이클래스를 들었다. 취향에 딱 맞는 완벽한 원두나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황금 레시피를 찾으러 갔다면 낭패인 결과였다. "편의점 커피, 좋은 커피일까요? 그럼 스타벅스 커피, 좋은 커피일까요?" 하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는 클래스였기 때문이다. 정답을 맞혀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동공을 이리저리 굴리며 "글쎄요..." 하는 나에게 사장님은 커피에 정답은 없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가성비와 타이밍, 그리고 나의 취향이라고 했다. 급할 때 가까운 곳에서 2,000원대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훌륭한 게 아니냐고. 또 스타벅스 커피는 탄 맛이 강하지만 그게 취향인 사람도 있을 거라고. 결국 좋다 하는 커피를 파는 카페의 사장님들은 자신에게 맛있는 커피를 강요할 뿐이라고. 그 덕분인지 90분의 시간 동안 나는 커피를 조금 더 자유롭게 느낄 수 있었다. 얼음에 바로 커피를 내릴 때와 커피를 내린 후에 얼음을 섞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맛있는 아이스커피일까. 분쇄도를 굵게 하고 느리게 내리는 것과 분쇄도를 가늘게 하고 빠르게 내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맛있을까. 나는 자신 있게 이것이라고 답하기도, 그게 그거 아닌가 알쏭하다고 말하기도 하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도 내가 뭘 좋아할지 몰라. 한 번 알아가 볼까? 하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이었다. 아마도 내가 산미 있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산미가 없는 커피는 없다는 것. 또 산미가 높다고 신맛만 나는 건 아니라는 것. 내가 익숙하지 않은 향은 존재해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런 것들을 알아가며 나는 새로운 핸드드립 카페를 찾아가면 산미 있는 원두를 추천받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 덕분에 만난 학교 근처 카페의 향긋한 블루베리 커피가 그리울 만한. - 물론 아직 학교가 그립지는 않다. '아직'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도, 잘 모르겠다. -


얼마 전에는 서울로 여행을 다녀왔다. 암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혼자 가는 여행이었다. 비 오는 날에는 빗소리가, 쨍쨍한 날에는 빛과 그림자가 스며드는 중정을 가진 한옥스테이. 오랫동안 저장해 두었던 돌담길의 공유 서재. 인공 조미료 없이 제철 채소로 만든 밥상을 내는 비건 식당. 그렇게 오래되어 익숙한 취향과 이제 막 새롭게 가지게 된 취향이 공존하는 여행길이 즐거웠다. -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돼지고기나 양고기를 구워 먹던 내가 요즘에는 대체로 비건 메뉴를 선호하게 되었다. 건강상의 이유도 있지만 먹다 보니 맛있고 속이 편하기도 하다. -


다만 조금 의문이 드는 장소도 있었다. 원두를 추천해 달라는 나의 요청에 한 핸드드립 카페의 사장님은 43,000원짜리 커피를 추천해 주셨는데, 너무 비싸 다른 원두를 맛보겠다는 나의 말에 "어차피 43,000원짜리 원두가 제일 맛있는데 돈을 두 번 쓸게 할까 봐 그런다"라고 하시는 데 이어 내가 고른 "12,000원짜리 원두도 43,000원짜리 원두보다 못할 뿐 아주 좋은 원두"라는 설명을 해주셨다. 최대한 편견 없이 맛보려고 했고 맛이 없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나는 친구에게 "사장님의 프라이드에 비해서는 큰 특징이 없는 커피"라고 평했다. 물론 한 가지의 맛이 튀지 않고 전체가 조화로운 것도 좋은 특징이겠으나 이 카페에 다시 와 커피를 마시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 날에는 카펫, 소파, 책장 속에 CD, LP, 필름카메라, 조명과 벽에 걸린 액자, 재즈 음악의 큰 베이스 소리가 모두 조화로운 필름 현상소 겸 카페에 갔다. 매장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면 다 마실 때쯤 스캔본을 받아볼 수 있다는데 버스 시간에 맞추느라 빠르게 커피를 마시고 출발했다. 그런데 버스를 타기도 전에 도착한 사진은... 반 이상이 날아가고 날아가지 않은 사진도 흐릿하거나 어두웠다. 토이 카메라는 처음 사용해 본 터라 촬영 미숙으로 결과물이 좋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일회용 카메라는 다년간 여행 때마다 들고 다녔고 이렇게 망한 적이 없어 조금은 의아했다. 빛나던 공간이 현상 결과물을 보장해주지는 않는 건지, 속도와 질을 모두 가져갈 수는 없는 건지, 나의 필름카메라 사용이 미숙한 건지 모르는 채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덕분에 생긴 오기 때문인지 이번 달에는 필름카메라 클래스를 수강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제 자동 카메라를 졸업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 마음과 함께.


매일같이 출근을 하고 사람을 만나다가 휴직 후 갑작스럽게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본가가 접근성이 좋지 않아 체력이 생긴 지금도 자주 외출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공간과 시간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몸은 조금 힘들어도 집은 깨끗했으면 좋겠다거나. 책을 읽는 데 불편하지 않을 만한 나만의 의자를 제작하고 싶다거나. 캡션을 생략하거나 짧게 쓰는 사진 매체보다는 글로 채울 수 있는 매체를 선호한다거나. 나는 손재주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인내심이 없었을 뿐 뜨개질도 비즈 공예도 남들만큼 할 수 있다거나. 그렇게 서른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되는 나의 새로운 모습이 있고 오로지 나를 위해 채워보는 조금씩 넉넉해지는 취향이라는 보물 상자가 있다. 그런 나의 취향이 누군가에게 고집스럽게 강제되는 대신 자연스럽고 은은하게 퍼져나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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