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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나 Sep 18. 2024

즐기기 위해 잘할 필요는 없다

취미는 취미일 뿐

스물네 살에 첫 카메라를 샀다. 주변에 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동호회에 들었던 것도 아니라서 거창하게 '출사'를 나가기보다는 약속이 있는 날에 카메라를 들고나가는 걸로 사진 찍기를 시작했다. 사진을 보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을 알 수 있다던데, 당시에 나는 인물이나 문 사진을 자주 찍었다. 모델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다양했고 문 자체가 아닌 문 너머의 배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어디로든 호기롭게 나아가던 한창의 나이에 어울릴 만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진짜로 내가 담고 싶었던 대상은 하늘과 물, 그리고 숲이었다. 대상이 구체적이지 않을수록 빛의 움직임과 같은, 좋은 사진을 위한 조건을 맞추기 어렵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조금 더 수월한 것들을 찍었을 뿐이다. 약간 흔들리더라도 선명히 담기는 친구의 표정. 조금 어두워도 선과 선이 만들어내는 경계가 분명한 문. 여느 날과 같이 사진을 찍고 결과물에 불만족스러워하는 마음을 비춘 적이 있는데, 그때 "누가 평가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삶을 팍팍하게 만들었던 건 늘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의 평가였다. '힘들게 카메라까지 들고 나왔는데 휴대폰으로 찍는 것보다 못 찍을 거라면 차라리 찍지 않겠어.' 하는 그 마음이 어쩐지 시험 전날 밤을 새워서 컨디션이 나쁘다거나 시험날 컴퓨터용 사인펜을 놓고 와서 당황했다고 말하는, 열심히 해놓고도 결과가 좋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학습자의 방어기제와 닮아 있었달까. 내가 화질 좋은 DSLR보다 필름 카메라를 선호하게 된 이유도 사진이 어떻게 찍히는지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과물을 기다리는 설렘만큼이나 결과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유로움이 컸던 게 아니었을까. 몽글몽글한 필름 특유의 색감과 감성은 둘째 치고라도 말이다.


교사가 되고 난 후에는 '인간 김유나'와 '교사 김유나'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취미를 적극적으로 찾아 헤맸다. '인간 김유나'로 존재하는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다면 풍요롭게라도 만들어야겠다며. 그 도전의 일환으로 헬스를 시작했을 때 어느 동네에나 발에 채는 헬스장마저도 진입장벽이 꽤나 높다고 느꼈다. 운동 기구의 위치를 조정하거나 원판을 끼울 때는 자신 있게 하지 못하고 주변의 눈치를 재빠르게 살폈고, 프리웨이트존에서는 몇십 킬로씩 들어대는 몸짱 남자들 사이에서 쭈글거리며 1-2kg의 덤벨을 들어 올렸다. 꽤 긴 시간 PT를 받고 헬스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이며 험악해 보이는 회원일수록 실제로는 순박하다는 것을, 모두가 자기 운동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남에게까지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헬스장에 있는 대부분의 기구를 망설임 없이 다룰 줄 알게 되었고 많이 드는 것보다는 나의 몸에 맞게 정확히 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나는 취미도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만 해낼 수 있다는 식의 악바리 근성이 자라나고 있었다.


또래 선생님과 꽤 오랜 시간 테니스를 배운 적도 있다. 테니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는 "잘할 거라는 감이 있는 취미를 골라서 하기 때문에 실제로도 대체로 잘하는 편"이라고 말했고 나는 "못할 걸 알기 때문에 도전의식이 생기는 거라 실제로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못할 걸 알면서도 해보려는 용기가 부럽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해보기 전인데도 무엇을 잘할지 못할지를 안다는 그녀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남들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건 합리적인 생각일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절정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운동선수가 화려한 기술로 금메달을 따는 순간. 인플루언서를 성공의 반열에 들어가게 해주는 인기 급상승 동영상.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데 이미 뛰어나다는 지인의 취미 생활.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노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누구였어도 지난했을 과정을 상상하는 제3의 눈을 기꺼이 떴다면 사회는 이토록 호시탐탐 누군가의 성공을 무너뜨릴 구멍을 엿보고 있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맥락에서 보이지도 않는, 때로는 주관적일 시간과 노력의 양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하지 않을까.


학생들에게 공부를 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말할 수 있었던 적은 없다. 나의 학창 시절에도 "공부를 하면 앞으로 선택권이 많아질 것"이라는 부모님의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듣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대신 아이들에게 "노력한 시간은 당장의 결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훗날 자신감이 되어 너희들을 지켜줄 것이니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너희만의 것을 찾아 노력해 보라"라고 말하곤 했다. 출근도 힘든데 주 3회 운동을 빼놓지 않았던 나. 못한다고 놀림을 받아도 함께 웃으며 테니스 경기에 나갈 줄 알았던 나. 몇 번을 풀러서라도, 결국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뜨개질만 하면 시간을 쉽게 보냈던 나. 그 기억이 위기의 순간에 나를 붙잡아줄 탄탄한 동아줄이라는 것을 사실은 알고 있다.


우리는 "본업천재"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일 잘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직업이라는 틀 안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먹고살기 위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도 맡은 업무를 해내고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느끼는 마음의 부담이 크다. 퇴근 후에 내가 나를 위해 선택하는 취미 생활에서는 그런 마음의 짐을 좀 부려도 되지 않을까. 꼭 잘해야만 재미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의미에서 늘 배우고 싶었지만 몸치라는 이유로 등록을 미뤘던 춤 학원을 한 번 알아볼까 한다. 용기를 내고 꾸준히 한다면 못할 게 뭐가 있나. 또 꾸준히 하는 대신 한 번 두드려보고 금방 내빼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라는 취미의 의미에 적합하지 않은가. 그것 역시 선택이라면 팍팍하게 말고 즐겁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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