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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나 Sep 24. 2024

주는 사랑이자 받는 사랑이 될래

결혼을 생각했던 사람과의 이별 후에

"연애에 을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에게 이 글은 공감하기 어려운 글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생활하다 보면 아이들이 "쌤,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조르는 날이 있다. 늘 지문을 쳐내는 데 급급한 영어 교사지만 "이 지문까지 수업하고 5분 더 얘기해 줄게!"라는 식으로 첫사랑 이야기를 진도를 나가기 위한 일종의 간식으로 나누어먹은 적이 종종 있다. 이럴 때 꺼냈던 나의 첫사랑은 스무 살 때 만났던 한 살 오빠이자, 가장 적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유일하게 오빠라고 불렀던 사람이다. 첫 남자친구는 아니었는데도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기도.


그도 나도 갑작스럽게 일정이 생긴 친구를 대신하여 미팅에 나갔고, 군입대를 목전에 두고 있어 미안하다는 이유로 연락처를 주지 않았던 그의 SNS 계정을 찾아 채팅을 보냈던 것도 나였다. 그래서인지 그를 떠올리면 촘촘히 휴가 계획을 세우던 나, 학교 앞에서 그를 기다리며 "이렇게 기다리는 것만도 너무 설레!"라고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낼 만큼 들떠 있었던 나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 계획을 기피하고 돌발적인 상황을 즐기는 극강의 P이자 에너지가 없어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실로 엄청난 사람이었다. - 역시 그리운 것은 스무 살, 순수하게 모든 것을 줄 수 있었던 나의 모습이지 그가 아니라서일까. 돌아보면 사실 그와의 연애는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뻐했다가, 망연자실하는, 언젠가는 내려야 할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그에게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서운함이었다. 교환학생을 가 먼 타지에서 적응하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낮밤을 바꿔 통화를 하려는 나보다 휴가날 가족과의 식사가 더 중요하다니, 같은 상황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다 믿었는데 내가 취업 준비에 방해가 된다니, 하는 식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한 치의 거리도 용납하지 않았던 내가 그를 얼마나 숨 막히게 했을지 공감하며 이별의 이유를 다시 정립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가 서운하게 행동하지 않았더라면'이 아니라 '내가 조금 덜 좋아했다면' 지속했을 수도 있는 관계이지 않았을까,라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첫사랑과는 반대의 사람도 만났다. 결혼을 해도 딩크를 꿈꾸는 친구들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아이를 낳고 싶었던 내가 '이 사람이라면 임신, 출산, 육아라는 삶의 여정에서 나를 외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에 결혼을 생각했다. 여행에서 과식을 해 배가 아프다는 나를 앉혀두고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비닐봉지에 따뜻한 물을 넣어 배에 올려주고 담요에 돌돌 말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었다.


암에 걸리고, 항암 치료를 받더라도 건강한 아이를 낳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난임 병원에 등록해 난자 동결을 위한 과배란 주사를 시작했다. 치료를 해야 한다는 비장한 마음 탓에 암에 걸린 것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거나 슬퍼할 틈이 없었는데, 남편의 손을 잡고 와 인공수정을 목적으로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엄마나 아빠와 동행해 시술 동의서를 받아 들며 "미혼인데요"와 같은 말을 하게 되니 어딘가에 봉인해 두었던 마음이 조금씩 넘쳐흘렀다. 그저 호르몬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힘들다는 나의 말에 그는 "좋게 생각하라"라고 했을 뿐인데, 처음으로 나는 그에게 울고 불고 화를 냈다. 나는 집에서 부모님 앞에서 슬퍼할 수도 없는데, 그냥 들어주면 되지 왜 그렇게 성급하게 좋은 결론을 지으려는 거냐고, 암이 더 자랄까 긍정의 씨앗을 심어주고 싶었을 뿐이라는 의도를 알면서도 그때는 그렇게 떼를 썼다.


항암 치료가 끝나고 '이제 좀 살만해졌다'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가 이별을 통보했다. "암에 걸려서 점수 엄청 깎였겠다. 이제 누가 나랑 결혼하려고 하겠어."라고, 엄마에게 농담처럼 말하곤 했는데 어쩐지 대머리가 되어 퇴직을 고민하는 동시에 앞으로 먹고살 일을 걱정하는 불안정한 시기에 유일하게 안정을 주던 사람을 잃게 되니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에는 미안한 마음이 부유했다. 어쩌면 암에 걸리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기대는 쪽이고 그는 버티는 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암에 걸린 탓에 그 저울이 더 기울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고. 누군가는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슬픈 사람이 두 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나의 잘못이 아니지만, 나는 내 몫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슬픔의 반쪽을 가져오지 못해서 여전히 미안함을 느낀다.


학교에서 보낸 6년이라는 시간을 인정해 주고 긍정해야 그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마찬가지로 지난 사랑에 대해 '내가 이럴걸'이라며 후회하거나 '이랬다면'이라고 가능하지도 않을 상황을 가정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간 움푹 파이거나 까칠하게 튀어나온 부분들을 둥글려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건네겠다.


주는 사랑도 받는 사랑도 되어보니 이제 나는 주는 사랑이자 받는 사랑이 되고 싶다. 내가 넘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넘치도록 사랑해 주는 기적이 나에게 찾아올까? 아직은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옷 잘 입는 할머니로 멋지게 늙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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