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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나 Sep 19. 2024

나는 대머리도 줄무늬 손톱도 타고난 기질까지도 좋아!

30대 항암 후기 심리 편

"첫 번째 항암제 들어갑니다. 몸이 가렵거나 가슴이 답답하면 저희 바로 옆에 있으니까 꼭 불러주세요. 30분 정도 천천히 들어가고 이상 없으면 속도 올릴게요." 침대 위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이언맨이 한창 슈트를 만드는 중이었는데 나의 관심은 오로지 나의 호흡과 심장 박동에 있었다. "이상 없음. 럭키!" 간호사 선생님이 말한 30분이 지나자 안도한 나는 휴대폰 메모장을 켜 그렇게 기록했다. 1차의 증상이 회차가 거듭할수록 반복되거나 심화되는 경우가 많으니 증상을 상세히 기록해 두면 도움이 된다는 항암 선배들의 조언을 착실히 따르는 거였다. 얼음을 입에 물고 있으면 입 안의 혈류량이 감소하여 항암제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말도, 밑져야 본전이니 텀블러를 덜그럭거리며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는 얼음을 그다음 얼음으로 교체해 주는 데도 열심이었다.


유방암을 발견했을 때 촉진만으로도 종양의 크기가 너무 크다며 전절제 수술을 결정했다. 도려낸 종양의 병리 검사 결과 2기 유방암으로 진단을 받고 "세포 분화도가 빠르고 나이가 어리니 무조건 항암을 하는 것이 이득이다"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통보로 3개월에 걸쳐 4번의 TC 항암 치료(Docetaxel 도세탁셀 + Cyclophosphamide 사이클로 포스파마이드)를 받았다.


소변볼 때의 통증, 홍조, 입 안의 텁텁함으로 시작되는 인후통, 전신 근육통, 손목과 무릎의 관절통, 소화 불량,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왔던 변비와 설사, 두통, 발열... 항암제의 독성으로 많은 증상을 경험했고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신체적인 부작용에 관한 후기를 블로그에 남기기도 했지만 - 역시나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블로그 링크를 댓글에 첨부한다. - , 이 글은 신체가 아닌 마음의 변화에 집중하고자 한다. 신기하게도 항암주사실을 떠올리면 두렵고 끔찍한 기억이 아니라 다분히 일상적인 장면들이 떠올라서일까. 코를 골며 잠드는 아저씨. 다른 환자들이 불편할까 "아이고. 많이 피곤하신가 봐. 그래도 코 골면 안 돼요!"라며 그런 아저씨를 깨우는 간호사 선생님. 점심시간에 환자가 몰려 오늘은 어떤 순서와 속도로 밥을 먹을지 의논하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목소리. 비좁은 칸에 링거대와 자신의 몸을 구겨 넣다 포기한 채 문을 열고 볼일을 봐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주사실 앞 화장실 풍경 같은 것들.


항암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인생 첫 수술을 견뎌냈고, 퇴원을 앞두고 있었다. 며칠간 함께 병원생활을 하며 침대를 일으키고 화장실에 가고 밥을 먹는, 언제나 당연했지만 이제는 혼자 할 수 없는 것들을 살뜰히 도와주고 나서야 출근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엄마를 보내고 남겨진 병실에서 다시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서서히 늘어간다는 일종의 성취감을 맛보고 있었는데, 끝을 생각하며 다독이던 마음이 더 큰 고비의 시작을 마주하자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쳤다. 일주일 가량 인터넷을 뒤지며 항암을 하거나 하지 않는 여러 가지의 경우의 수를 찾아보고, 나는 왜 온코타입(유방암 재발 가능성과 항암 치료의 효과를 예측하는 유전자 검사)을 하지도 않고 항암 당첨인지를 원망하고, 가족과 남자친구 앞에서도 참았던 눈물을 먼 길을 병문안 와준 친구 앞에서 터뜨리고 나서야 창창한 나의 미래를 위해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어차피 해야 한다면 어떻게든 대비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돌아보면 항암 치료의 실제적인 부작용보다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는 불안감이 더 무서웠다. 항암 주사를 맞고 증상이 나타나기까지 걸리는 3일이라는 시간은 달려드는 차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겁먹은 사슴이 된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빨리 증상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게 아닌데 언제 나타날 것인지를 꼼꼼히 체크하는 모순적인 불안감이었다. 이럴 때 나는 병원의 입원 수속실에 붙어있던 통증 강도표를 떠올렸다. 1부터 5까지 통증의 강도를 매기려다 보면 전에는 얼마나 아팠었나 현재의 통증에서 벗어나 비교해 볼 수 있었고,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회복하고 다시 나의 통증을 느껴보면 고작 1-2 정도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때로는 마블 유니버스의 완다가 되었다고 상상하며 떠오르는 고통을 빨간 공 안에 넣고 염력으로 부풀렸다가 줄였다가 했다. 상상력의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인지 확장시키는 것보다는 무로 수렴시키는 쪽이 쉬웠고, 그렇게 어떤 통증이든 옅어질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섭리를 인식하기도 했다. 시간을 가게 하는 것에 절실히 매달리는 날들도 더러 찾아오곤 했지만 어쨌거나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변함없는 진리가 그렇게도 위안이 되었다.


항암 주사를 맞고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다는 과학의 14일이 지나기 전 쉐이빙을 했다. "불편하시면 거울을 가려드릴까요?"라고 묻는 미용사에게 "어차피 집에 가면 마주해야 하는데요."라며 비장하게 거울 속 나를 주시하다가 약간의 옆머리를 남긴 모습에 반지의 제왕 속 골룸 같다며 - 나중에 영화를 다시 보니 골룸의 머리가 나보다 훨씬 길고 풍성해서 부럽기까지 했다. - 엄마와 깔깔거리며 웃었다. 머리는 또 자란다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다음 날 가발을 쓴 나의 모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뽕이 심했다고나 할까. 어색한 모습에 하루종일 신경이 곤두섰는지 "나는 화장이나 헤어 스타일링 같은 외적인 부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건 그래도 괜찮았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쓸 수 있는 거였다..!"라고 일기에 마음을 털어놓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 처음 쉐이빙을 한 후에는 빳빳한 머리카락이 비니를 뚫고 나오는 뾰족한 촉감이 불편했다. 과학의 14일과 2차 항암을 지나며 눈썹 정도 길이의 머리카락이 이불과 베개와 방바닥, 나의 옷과 몸 여기저기에 성가시게 떨어지고 나서야 부드러운 민머리가 만져졌다. 한여름의 온도 덕분에 가족들 앞에서는 용기를 내 비니를 벗었고 이내 여러 종류의 가발 - 앞머리가 없는 긴 웨이브, 앞머리가 있는 똑 단발, 애매한 기장의 밝은 갈색, 길고 굵은 웨이브의 애쉬 그레이 - 을 쓰는 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반곱슬이라는 이유로 멋대로 뻗치곤 하던 머리에서 벗어나 찰랑이는 생머리가 되어보고 학교라는 다소 보수적인 환경에서는 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컬러도 머릿결 상할 걱정 없이 해보니 꽤 즐겁기까지 했달까. 가발은 쓰면 쓸수록 길들여지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언제 벗을지만을 궁리하며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던 가발도 근래는 가발이라는 것을 까먹고 내 머리칼처럼 만지고 쓰다듬게 되었다. 가발은 손으로 만지면 잘 상하는 것 같은데도 말이다.


항암 치료가 끝나고 쉽게 말해 조금 살만해졌는데 꽤 오랜 시간 만나던 남자친구와 이별하게 되었고 복직이니 이직이니 하는 현실적인 고민도 시작되었다. 나를 안정적이게 만들어줬던 관계와 직장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혼란스러운 시기라는 생각에 심리 상담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씩씩하고 용감하게 나의 시련을 감당해 왔는지, 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서 벗어나 실제로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인식해 보는 낯설지만 분명 도움이 될 시간을 묵묵히 걷고 있다. 사실 안정을 주는 건 타인이나 환경이 아니라 나의 내면이라고 생각해 본다.


4번의 항암 주사는 분화가 빠른 세포를 모두 공격하기 때문인지 주사를 맞은 시기에 자란 손톱이 검어지면서 줄무늬처럼 보이는 흔적을 남겼다. "다 자라고 나면 손톱에도 평온이 찾아올 거예요."라는 친구의 위로에 나는 "손톱의 나이테도 맘에 들어요! 뭔가 멋지거든요! 내가 이겨낸 시간들이 손톱에 남다니!"라고 답했다. 잘라야 할 만큼 길었는데 그런 나의 줄무늬 손톱이 자랑스러워 잊지 않으려고 사진으로 남겼다. 손톱이 얼마나 검어질 것인지 무서워하며 시시때때로 손톱을 들여다보던 밤을 떠올리며 스스로가 유쾌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나의 대머리도 줄무늬 손톱도 타고난 기질까지도 좋아! 이렇게 나의 한 챕터를 마무리해 본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 전 정비의 시간을 나에 대한 긍정으로 채워 넣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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