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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나 Sep 12. 2024

쉼의 미학

서른 살에 찾아온 암이 나에게 알려준 것

그래도 아무 의미가 찾아지지 않는 시간이 존재할지도 몰라. 결과를 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노력만 낭비한 시간 말이야. 그렇지만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말해줄게. 너의 가치는 너의 생산성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나는 우리가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힘내자고 다짐했던 아침을, 그날의 온도와 햇빛을, 잠 못 들며 나눴던 고민들을, 그 모든 순간들을 기억한다고. 그리고 그 순간들이 앞으로 우리를 더 단단하게 해 줄 걸 믿는다고.
2017년 11월 4일 (취업 준비생이던 시절, 조각글 계정에 남긴 글)


고등학교 입시, 대학교 입시, 취업 준비...  나는 3-4년 단위의 목표를 향해 달리고 그 성취 여부에 따라 생활 반경을 옮기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을 때는 산발적으로 에너지를 쏟곤 했다. 취업준비생이던 어느 날에는 버스에 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 피곤해서. 21학점 수업과 주전공 학위의 졸업 시험, 복수전공 학위의 졸업 논문, 알바와 대외활동, 사립학교 지원과 수업 실연, 일반 기업 지원과 인적성 검사와 면접... 에너지를 한 데 모아도 될까 말까인 일들 중에서 선택이 어렵다면 모두 해보겠다며 며칠 밤을 쪽잠으로 새우고 나니 그렇게 눈물이 떨어지는데도 스스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르는 텅 빈 상태였다.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스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달리는 물체는 계속 달리려는 힘을 가진다. 천천히 속도를 늦춰보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젊음의 패기 탓인지 당장의 결과가 좋았기 때문인지 오히려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멈추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다.


'다음 목표는 뭐지?' 교사가 되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익숙한 질문이 떠올랐다. 열정을 쏟아부을 곳을 찾고 싶었지만 동시에 떠나고 싶기도 했다. 늘 그랬듯 새로운 곳으로 훌쩍. 배울 게 많았던 초임 교사의 한 해는 참 빨리 흘러갔다. 관계 형성, 학급 경영, 협의와 수업, 출제와 평가, 행정 업무... 지금이라면 5분 정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서 기안도 끙끙거리며 1-2시간을 붙잡고 있었고 인사할 자리도 많다 보니 야근도, 야근 이후의 모임도, 다음날 피곤한 몸에 커피를 때려 부어 억지로 가동하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한 해를 살아보고 나면 다음 해는 좀 나을까 싶었는데 두 번째 해에는 감당하기 벅찬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사람은 주변 환경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자기 자신을 통제한다던데, 그 시절의 나는 모든 화를 운동으로 풀었다. 3개월의 식단과 매일 같은 운동의 결과 바디프로필을 찍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는 코로나가 터졌다. 자의든 타의든 속도가 줄어들 때면 이제 좀 쉬어볼까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동시에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는 아직 젊은데. 이렇게 열정이 넘치는데. 이 젊음과 열정이 헛되게 쓰이면 안 되는데. 그렇게 야간 대학원을 진학하는 것으로, '갓생'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부터 시작된 나의 '갓생' 편승은 계속되었다.


모순적이게도 관성이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은 '게으르다, 쉬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iners'라고 한다.


7년 차 교사가 되어 개학을 3일 앞두고 있을 때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내가 암이라니!' 하는 드라마틱한 순간도 없었고 감정의 고삐를 풀어 엉엉 울어낼 여력도 없었다. 그저 가장 빠른 예약이 짧게는 두 달 후, 길게는 반년 후라는 대학 병원 이곳저곳에 전화하며 그날 하루를 보냈다. 유방암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지 '그래, 뭐. 암은 잘라내고 나중에 그 자리에 멋지게 타투나 하나 받지 뭐.' 하는 비현실적인 생각과 '이제 합법적으로 쉴 수 있겠다.'라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를 두고두고 붙잡은 생각은 '이제 합법적으로 쉴 수 있겠다.'라는 생각. 내가 그만큼 힘들었나. 그만큼 학교에 가기 싫었나. 그런 줄 알았으면 진작 그만둘걸. 나를 좀 더 돌봐줄걸.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두지 말걸. 근데 내가 몰랐나. 알았는데 모른 척했나.


다행히 빠르게 진료를 볼 수 있는 병원을 소개받아 5개월 만에 수술과 난자 동결, 항암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 아프다는 합법적인 사유로 경제 활동이나 가사에서 모두 면제되었고 통증 탓에 글도 가까이할 수 없었다. 의사의 권고로 나가는 산책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누워서 마블 영화를 정주행 하며 시간을 보냈다. - 학교에서 나에게 커피는 뜨겁게 마실 수 없는 음료였다. 잠깐 할 일에 집중하고 나면 차갑게 식어있는 커피를 수업에 들어가기 전 빠르게 입에 털어놓곤 했다. 요즘의 나는 언제 마실 수 있는 온도에 도달할 것인지를 기다리며 한참 동안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곤 한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다시 책도 보고, 글도 쓰고, 새로운 장소에도 가본다. 제철 재료로 건강한 밥상을 차리고, 드라마를 시청하고 운동도 한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도록 두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잘 자고 쉬어도 이유 없이 피곤한 날이 있으니, 그런 날에는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누워 있는다. 애용하던 스마트 워치도 서랍 한견에 고이 넣어두었다. 운동 칼로리와 시간, 일어나는 횟수에 대한 결정 권한을 기계에게 주지 않고 스스로 가진다. 오늘은 조금 더, 내일은 조금 덜, 그렇게 그날그날 나의 기분과 컨디션에 귀 기울인다.


쉼도 배움이 필요하다. 부지런한 삶에 대한 찬사가 끝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세를 거스르려면 더 큰 힘과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유방암이라는 급브레이크 덕분에 멈췄던 시간을 다시 달리며 나는 마음껏 액셀을 밟는 대신 잊지 않고 브레이크를 끊어 밟고 있다. '대학원 한 학기 남았는데, 휴직한 김에 대학원 졸업을 해야 복직을 하든 새로운 일을 하든 매끄럽게 시작할 수 있을까?'와 같이 액셀을 밟고 싶은 충동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전과는 달리 '대학원에 묶이면 또 훌쩍 떠날 수도 없잖아. 지금 아니면 언제 쉬겠어. 여행이라도 가자.' 하는 마음으로 다시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뗀다.


조금 떨어져서야 다시 느끼는 것들도 있다. 첫 해 아이들에게 자주 띄우던 칠판 편지. 말로는 "쌤, 글씨 진짜 못 써요." 하면서도 칠판을 찍던 찰칵 소리들. 그때는 스스로 베테랑 교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학생을 상담하며 "너 아직 어른 아니고 애야. 애는 애답게 하면 돼." 하며 너무 일찍 커버린 아이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던 장면. 교무실 책상 한편에 붙어있던 그 애가 필사한 시 한 편. 나를 밀치고 때로는 반말을 하던, 그래도 나만큼은 편이 되어주고 싶던 아이가 졸업해서 "변화할 수 있다고 한 건 선생님뿐이었어요." 하는 편지를 들고 와 여전히 삶을 선택하고 있음을 증명하던 얼굴. 암 진단 소식에 울컥하며 보내준, 이런 위기가 아니라면 몰랐을 나에 대한 생각이 엿보이던 연락들. 종양 제거 수술을 받던 날 일과 중간에 모여 함께 기도해 준 선생님들. 그리고 학교가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이제는 친구가 된 소중한 인연.


그렇게 암이 나에게 가르쳐준 많은 것들 중 하나는 쉼의 미학이다. 이제는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으로  무작정 달리는 대신 - 아, 물론 지금은 휘날릴 머리카락이 없다. -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를 눈으로 좇으며, 천천히 걸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 학년도가 끝나면 자연스레 다음 학년도가 시작되는 것처럼 익숙한 속도를 유지하는 결정은 변화를 시도하는 것보다 쉬운 편인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유방암이었던 급브레이크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만나지 않기를. 그보다는 언제나 쉼을 용기 있게 선택해 주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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