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사명과 학교라는 환경
모의고사 날인 오늘은 비가 왔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이른 등교 시간에 아이들은 왔는데, 교무실은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시험지를 깔고, 시간표를 출력하고, 듣기 평가를 점검하고, 서로 다른 위치의 세 반을 뛰어다니며 휴대폰을 걷었다. 모른 척하며 가만히 앉아있어도 학교는 어찌어찌 굴러갔을 것이다. 내가 학교에서 하는 역할은 언제든 누구든지 대체할 수 있고, 오히려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많을 테니까. 그래서 나의 분주함의 이유는 학교에 대한 애정도 아니고, 맡은 역할에 대한 책임감도 아니고,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아니고,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확신이나 대단한 사명감이 아니라 어쩌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지도 모른다.
2021년 8월 31일 (교사 4년 차, 조각글 계정에 남긴 글)
내가 처음으로 한 경제 활동은 19살에서 20살 사이 한 달의 겨울을 영어 캠프의 보조 교사로서 산 것이다. 다시는 이 학급 구성원으로 지금처럼 모일 수 없다는 생각에 수료식 날 학부모님의 걱정을 살 만큼 엉엉 울어댔는데, 생각해 보면 이때의 애틋한 마음을 계기로 수많은 과외, 학원 알바를 거쳐 학교 교사가 되지 않았나 싶다. 20대 초반들만 모여있는 사무실 - 교실의 책상을 이어 붙였을 뿐이니 사무실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정도이다. - 에서, 또 초등학생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장난을 주고받는 시간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던 건 덤이고, 그보다 기억에 남았던 건 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레크리에이션을 준비하며 무대 뒤에는 처음 있어 보았는데, 무대 앞을 보며 불평을 늘어놓는 건 쉬운 일이지만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소소한 하나의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도 참으로 까다롭고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업을 준비하다 보면 갑자기 컴퓨터나 스피커, 빔프로젝터가 말을 듣지 않아 시설 관리인을 부르곤 했는데, 그분이 등장하면 안 되던 기기가 바로 제대로 작동하곤 했다. - 때로는 콘센트를 꼽지 않았다거나 버튼을 잘못 눌렀다거나 하는 멍청한 실수의 결과였다. - 부를 때마다 뛰어오셔서는 1분도 되지 않아 교실문을 나가시는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분은 "불러주는 곳이 있어 좋죠. 이 나이 되면 불러주는 곳이 있는 게 감사한 거예요."라고 하셨다. 그 말이 너무도 진심이라 순진한 열아홉의 마음은 '그렇구나, 내가 선생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죄송할 일은 아니구나.'라고 안심해 버렸다.
그와 비슷한 깨달음, 그러니까 나를 뽑아주고 학생들을 믿고 맡겨주는 직장에 대한 감사함은 교직에서 넘어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주곤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약효도 사라지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곳은 사립학교였고, 그 특성상 선생님들의 구성이 바뀌는 일이 흔치 않았다. 업무 부서는 1년마다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바뀌기에 불만이 있어도 이내 해소되곤 했는데, 가르치는 교과는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래서 학교에는, 어쩌면 세상에는 어떻게든 해내려는 사람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또 맞게 하려는 사람과 아무렇게나 해치우면 그만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배워버렸다.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 느끼는 막막함과 외로움까지도.
교육학에서는 교사의 직업관을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본다. 사명을 바탕으로 하는 성직자관, 능력을 강조하는 전문가적 직업관, 그리고 경제 활동의 측면에서 보는 노동자적 직업관이다. 신기하게도 사회는 '교사의 사명'을 크게 사는 것 같다. 누구나 학교를 다녔기 때문인지 '학창 시절에 이런 선생이 있었고 선생이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상처를 투영해 교사라는 직업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럴 시간에 아이 감정 한 번 더 살펴주겠다'라며 교사는 출근해서부터 퇴근하기까지 조금도 딴짓을 하지 않고 학생의 마음만을 바라보기를 원하거나, '교사가 타투라니 교육적으로 옳지 않다'라며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교사의 사생활을 심판대에 올리곤 한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대신 잘 지내며 좋은 어른으로 성장시키고 싶고 그래서 좋은 어른의 표본이 되고 싶은 건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교사 자신일 텐데 말이다.
근무하던 학교로 가는 길에는 학교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찻길이, 그래서 그 길을 건너는 보행자들을 위한 작은 횡단보도가 있었다. 다섯 걸음이나 될까 싶은 그 횡단보도의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무단횡단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적이 꽤 많다. 나는 선생이니까, 아이들이 볼 수도 있으니까, 하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학교에서 나의 모습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크고 작은 결정들을 할 때도 나는 아이들에게 떳떳한가에 대해 고민했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될 때는 일종의 죄책감을 느꼈다. 이러고도 애들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냐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데 익숙해졌을 정도로.
치열한 학교 현장에서 교사로서 나의 마음은 어땠는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선생님'이라는 그림은 어떤 모습이었고 나는 그에 미치지 못했던 나의 일부를 어떻게 몰아붙이거나 용서하지 못하거나 외면했는지 이제는 바라봐주고 싶다. 사명도 능력도 돈도 어쩌면 교사라는 직업과 그 안에 담은 나의 마음을 설명해 주지는 못 한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세상을 남겨줘야겠다는 무게를 느낄 만큼 아이들과의 관계가 중요했고 어쩔 수 없었을 업무적 사건 사고들이 나에 대한 질타로 받아들여질 만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참 교사는 단명하냐고? 아니, 참 교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에도 여느 직장과 같이 열심히 하다 지치기도 하며, 때로는 부족하지만 실수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여유가 없기도 한 한 사람이 존재할 뿐이다. 참 직장인, 참 가수, 참 운전기사는 없는데 왜 참 교사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고유명사가 되었을까?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 김유나'로서 행복해야 '교사 김유나'로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되뇌며, 잘했든 못했든 열심히는 했던 나의 6년을 인정해 주려고 한다. 부족한 부분도 너그러이 안아주며, 그런 자책과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 역시 좋은 선생님이라 그런 게 아니냐고 위로해주고 싶다. 그러고 나서야 병 휴직 기간이 끝나면 나는 어디로 향할 것인지 알 수 있겠지. 퇴직일까, 이직일까, 복직일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지만 아직은 열린 결말인지도 모르겠다. 힘들었던 기억만큼 교사만이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 역시 강렬하기 때문일까. 타인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하며 때로는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는 일은 참 드물고 귀한 것 같다. 그런 교사로 살았던 나의 시절을 통째로 오려내지 말고 조각조각 소화시켜 보자고, 이 글과 함께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