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영어 교사가 진짜로 하고 싶은 수업
성함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중학교 시절의 미술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껌을 종류별로 나눠주시면서 마음껏 씹으면서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 다른 시간에 혼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껌을 씹지 않았다. 자유와 즐거움은 미술 시간에 있었으니까.
교사가 되고 보니 학교에는 학생 때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많은 규칙들이 존재했다.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지만 튀거나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아서 나 역시 그 많은 규칙들을 꽤나 열심히 지켰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선을 지키고 이기적이지 않은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규칙을 준수하도록 지도했다. 굉장히 힘 빠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르고 달래기도 하고 혼을 내기도 하면서.
그러나 '이곳에는 정말 낭만도 없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나도 납득되지 않는 이유를 아이들에게 납득시키려니 당연히 그 결과가 실패이기도 했다. 폭염 경보가 내린 날 에어컨을 틀어달라는 아이들에게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야."라는 마땅한 이유를 들어주기보다 "쌤은 그런 권한이 없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고, "머리 염색하는 거랑 학교 생활이랑 무슨 상관이에요?"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속으로는 '그래, 상관없지. 나도 알아.'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규칙은 협의를 통해 바꿔야지 일단 불이행한다고 바뀌는 게 아니야."라고 얘기했을 뿐이니 꽤나 고리타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안전사고가 났을 때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야외 수업이나 요리 수업을 할 때 일일이 허락을 구하고 때로는 거절되며 불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둥 조건이 붙는 게 내심 답답하기도 했다.
수업 시간에 껌을 씹게 한다고 아이들이 그것이 예의가 아님을 배우지 못할까. 사실 한 번의 결정보다는 평시의 행실이 훨씬 중요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유연하게 사고하며 굉장히 똑똑하기도 한데.
그렇게 교사로서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무게를 재며 수없이 많은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를 묵묵히 감내했다. 나의 가르침이 나의 경험과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벽에 부딪치기도 했다. 일례로 나는 시간을 쪼개거나 가득 채우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라 아이들에게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이라도 자서 수면을 보충해라!", "나중에 밤새서 할 생각하지 말고 자투리 시간에 복습해라!" 따위의, 가치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에 따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라는 잔소리를 많이 했다. 그런데 스스로 바쁜 학교에서 휴식에 대한 강한 열망을 느끼면서, 때로는 다 같이 둘러앉아 보드게임을 하며 소리치고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엄마 미소로 관찰하며 깨닫기도 했다. 여유와 행복도, 아니 어쩌면 여유와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에게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들까지 아이들에게는 가르치고 싶다는 것을.
영어 교사로서 하는 수업에 대한 고민의 결도 이와 비슷했다. 아직도 입시 위주의 고등학교에서는 '문법 번역식 교수법(Grammar Translation Method)'이 자주 쓰인다. 교사가 영어 문장의 구조를 설명하고 의미를 해석해 주는, 말은 못 하지만 독해는 기가 막히게 해내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방식의 수업이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나 고전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위해 등장했기 때문에 이 교수법을 사용하는 교실에서는 언어의 구조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동교과 선생님들과는 "이 문장은 무슨 구조인가요? A 구조로 봐야 하나요, B 구조로 봐야 하나요?" "C구조로 쓴 문장은 틀리게 채점해야겠죠?" "틀리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문법 규칙은 무엇일까요?"와 같은 대화를 자주 했다. 정답으로 존재하는 문법에 아이들의 언어를 끼워 맞추는 방식에 가까웠다. 실제로 "정답은 없다"는 수업을 지향하면서도 고사 때만 되면 "이러한 이유로 너의 답안은 틀렸다"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과정에 큰 괴리감을 느껴왔다.
대학원에서 - 현장에서 고민이 많아서 5년 차에 테솔 대학원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허락을 받지 못해서, 또 병 휴직을 하게 되어서 아직도 졸업하지 못하고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다. - '창발론(Emergentism)'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접하고 약간은 숨통이 트였던 기억이 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대두된다고 한다. 이해하고 이해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때문에 언어가 사용되는 과정에서 규칙과 패턴이 생기며, 이 체계는 굳어지는 대신 언어의 사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 '짜장면'이 '자장면'과 함께 복수 표기어로 인정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면 언어의 구조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런 관점에 따르면 언어를 잘하는 전문가는 존재할 수 없다. 언어를 사용하는 참가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핵심은 의미를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느냐에 있다. 실제로 우리는 문법에 어긋난 표현으로 멀쩡히 의사소통하는 경우가 많다. "Can I get two cups of coffee?"라고 수량사를 사용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옳지만, "Can I get two coffees?"라고 불가산 명사를 세어 버리면 오히려 간단하게 두 잔의 커피를 주문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영어를 잘한다는 말, 또는 원어민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런 이상이 명확하기에 완벽한 문법을 먼저 갖춰야 영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어 원어민으로서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오류를 범하지 않나. 발음이 틀릴 때도, 비슷한 단어를 잘못 말할 때도, 존재하지 않는 문법적 구조로 문장을 구성하기도 한다. 그렇게 대화에 균열이 생기면 다시 질문하거나 말을 정정하거나 표정과 손짓 발짓으로 소통에 이르기도 한다. 결국 언어를 사용한 경험이 누적되어야 의미의 전달과 상호작용을 위해 필요한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조정할 수 있다. 존재하는 규칙을 달달 외운다고 언어가 자연스럽게 터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원어민처럼 발음할 필요도 없다. 2024년 현재 약 15억 명의 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중 약 3억 6천 명의 사람들만이 영어 모국어 사용자이다. 남은 11억 4천 명의 사람들은 고유한 발음과 구조의 영어로 의사소통한다. 매개로서 언어를 사용하고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면 원어민이건 비원어민이건 그 언어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 실제로 종종 희화화되곤 하는 인도식 영어는 사용자들 간의 원활한 소통에 톡톡히 기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언어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 어쩌면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논리는 특정 배경의 사람들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주는 힘의 논리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성 지도와 영어 교육이라는 서로 다른 고민은 결국 같은 질문에 닿곤 했다. 아이들에게 테니스 라켓을 잡아볼 기회도 주지 않고 유명한 테니스 선수의 자세를 이론적으로 분석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진짜로 해주고 싶은 건 뭘까? 나는 아이들 손에 테니스 라켓을 쥐어주고 싶다. 아이들이 어디까지 칠 수 있을까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 정확하지 않더라도 공을 쳐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고, 자신의 몸을 다치게 하거나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테니스의 규칙을 체득하도록 도와주고 싶고, 그래서 아이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지켜봐 주고 알아봐 주고 싶다. 아, 이건 테니스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이 살아갈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