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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나 Sep 10. 2024

불안

MZ 세대의 연락, 표현 공포증 극복기

윙윙 - 즐겨보던 브이로그 영상이 느닷없는 전화 수신 화면으로 전환되면 느긋하던 표정 역시 동시에 전환된다. 다소 심각한 얼굴로. 전광석화처럼 음량키를 눌러 알림을 끄고 스팸 전화를 신고하고 집계하는 사이트에서 전화번호를 검색한다. 급한 전화일까, 미처 저장하지 않은 선생님이나 학부모님의 번호일까, 받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길까, 금방 끊어질까, 급한 일이면 다시 전화하겠지, 수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도 부재중 전화를 알리는 빨간색 숫자 1 표시에 쉬이 진정되지 않는 마음이 '보험 광고로 16건 신고된 번호'라는 검색 결과를 보고서야 가라앉는다. 이내 보험 광고 전화번호를 차단한다. 그렇게 차단한 번호가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다.


쓴 글을 읽고 또 읽는다. 여기서는 진짜 마음이 흘러넘쳤나, 여기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을 했나, 흰색 위 검은 글씨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엄격하게 검열한다. 턱을 넘지 못한 낱말의 조합은 진심이었을지언정 뿔뿔이 흩트려 무로 되돌려 보낸다. 이내 전송, 혹은 업로드 버튼을 누른다. 읽고 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첨부파일을 다시 열어본다. 밥을 먹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는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면 굳는다. 어떻게든 글은 나를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그건 나의 일부일 뿐이며 작가와 글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역시나 노력에서 그친다. 세상에 글을 발표하는 행위를 단두대에 오른다고 비유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작가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혼잣말을 얼마나 할까. 한다면 어떤 말을 할까. 나는 주로 "유나야, 괜찮아.", "사랑해."라는 말을 한다. 생각으로 할 때도 있지만 작게 속삭이더라도 소리를 낼 때가, 더러는 크게 말할 때도 있다. 누군가가 본다면 영화 <트루먼 쇼>의 트루먼을 보는 것처럼 다소 영화적이라고, 어쩌면 작위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트루먼의 이름이 말해주듯 모든 것이 거짓이어도 트루먼만큼은 자신의 삶에 진실했던 것처럼 괜찮다는, 사랑한다는 혼잣말은 스스로를 비현실적인 망상으로 몰아넣는 나를 구원하려는 또 다른 나의 진실된 목소리이다. 소용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효과적일 때도 있다. 그게 뭐 그만큼 중요해. 그럴 리 없어. 설사 그런다 해도 괜찮아.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나는 불안을 토닥여 잠재우곤 한다.


하지만 불안은 섣불리 빠져나와야 하는 해로운 대상일까. '불안한 마음은 어디에서 태어나 우리에게까지 온 건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랫말을 들으며 생각해 본다. 처음부터 연락이 불안했던 건 아니다. 다섯 식구가 18평 남짓한 공간에 살던 시절. 혼자만의 방도 없었거니와 방문 너머로도 대화 소리가 들리는 환경에서 사춘기 중학생이 친구와 은밀하게 나누고 싶었던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그때부터 나는 집에 오면 자연스레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울리는 것을, 어쩌면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곤 했다. 교사 2년 차에는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이 알게 된, 그래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민원을 겪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 이유가 타당했든 아니든, 수업과 수업 사이 10분의 쉬는 시간 동안 "학교로 가겠습니다."와 같은 느닷없는 문자 통보를 받는 방식으로 학기 초부터 시작해 1년 내내, 학급 경영에서부터 시험 문제와 채점에서까지 끊임없는 질문, 개입, 억지가 이어졌다. "체육대회 날 교복 입고 등교하나요?" 따위의 시시콜콜한, 시간을 가리지 않는 학생들의 카톡 역시 짜증이나 공포 - 나의 판단에 중요성과 시기 적절성이 떨어지더라도 답변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와 그 결과에 대한 중한 책임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감정이다. - 로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렇게 출근 시간 전부터 퇴근 후까지 학교에 에너지를 빼앗기고 나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모든 연락을 기피하고 싶어졌다.


나의 글을 보여주는 것은 왜 불안할까. 아무래도 나의 가장 취약한 면을 꺼내놓고 평가받기를 기다리는 것이니까. 연약한 상태의 나를 보호하려는 내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 아닐까.


그렇다. 그러니까 불안은 축적된 경험의 마땅한 결과이며 나를 지키고자 하는 타당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괜찮아.", "사랑해."라는 말은 불안을 성급히 없애고자 하는 허황이 아니라 불안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나아갈 길을 비추려는 빛의 발화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를 기꺼이 이해해 주는 친구들의 전화는 받지 않는 대신 실시간으로 카톡에는 답장한다. - 카톡은 그나마의 틈이 있기 때문에 덜 불안하게 느껴진다. - 그래도 사회적 구실은 해야 하니 업무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불가피한 연락은 받아낸다. 또 여전히 글을 쓰고 공유한다. 어린 시절 내가 불렸던 이름이나 닉네임, 혹은 허구적 캐릭터 뒤에 숨곤 하지만 이렇게 당당히 내 이름 석자를 걸고 써보기도 한다. 더 큰 불안을 동반할지라도 한 번 참아내면 두 번 세 번은 더 쉽고 그 이후에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당신의 불안은 무엇인가. 그 불안은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로 당신을 이끌고 있는가. 어쩌면 당신의 불안이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찔할 바를 모르는 채 이리저리 요동치는 마음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자.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괜찮아.", "사랑해."라는 마법의 단어가 함께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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