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메뉴를 품고 있는 숲 길의 맛집
28주 후, 12 몽키즈, 눈먼 자들의 도시, 킹덤. 최근에 다시 본 영화들이다. 스토리가 점점 아포칼립스 시대의 전원일기처럼 돼버린 워킹 데드 시리즈도 처음부터 다시 보려고 한다. 요즘의 재난 영화 같은 현실에서 생존 방법을 찾고 싶은 본능 때문인지, 좀비 영화 매니아의 당연한 플레이 리스트인지 모르겠다. 10년 넘은 재택 근무자를 자발적 재택 격리처럼 느끼게 하니 영향이 있을 것도 같다.
역시 이럴 때는 가까운 숲에 가는 것이 최고다. 사람 없는 숲에서 원초적 생명을 느끼고 싶었는데 어라? 보통 2, 3대의 차만 주차되어 있던 숲 입구에는 얼추 15대 정도의 자동차가 구석까지 늘어서 있었다. 이 상황에 단체 행사가 있을 리가 없는데. 하긴 요즘 다른 숲길도 산책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더니 다들 비슷한 생각인가 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자연과 거리 좁히기로 연결되는 건가?
이승이 오름 코스는 동네 숲 맛집 같은 느낌이다. 신례리생태숲길, 이승이 오름 코스가 ‘한라산 둘레길 수악길’과 연결되어 있다. 간단한 분식과 정식 코스가 함께 준비된 셈이니, 그날의 입맛에 맞게 고르면 된다. 게다가 메인 코스는 걷기에 넓고 편한 길이라 여럿이 산책하기에도 좋다. 오늘은 조용히 있고 싶으니 인적이 드문 코스를 선택했다. 그중에서도 해그문이소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숲의 소리가 주는 평화
해그문이소는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나무가 울창해 낮에도 햇볕이 내리지 않아 붙여진 이름이다. 조용하고 멍 때리기 좋은 곳.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찬 쓰레기통 같은 요즘의 내 머릿속을 비우기 좋은 곳이다. 조금의 여백이 있다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좀비 아포칼립스의 시나리오가 자동 기술되고 있는 내 머릿속 말이다. 해그문이소의 물가에서 널찍하고 평평한 돌을 골라 눈을 감고 앉아 있으니 이곳은 소리를 잘 모아주는 지형임을 알게 됐다. 여러 종류의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를 깔때기처럼 모아 들려주는 듯했다. 숲에서 부는 바람 소리는 파도 소리와 같아서, 이 공간을 고요한 물속의 공간처럼 느끼게 했다. 의미 없는 일어나는 자연의 현상에 집중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가라 앉혔다. 천천히 눈을 뜨고 느리게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비밀의 숲길 입구는 해그문이소를 벗어나 오르막에서 숨이 차오를 때쯤 나온다. 입구는 해리포터의 9와 4분의 3 플랫폼 같아서 머글들은 알아보지 못한다(정식 코스지만 관리가 미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숲길의 묘미 중 하나다. 나는 사람의 흔적이 적은 길을 좋아하는데 이 길이 꼭 그렇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가 아직도 길을 막고 있을 정도로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됐다.
커다란 삼나무들은 부드러운 이끼에 반쯤 덮여 있고,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적당히 뒤섞여 자라고 있었다. 숲길은 덜 인위적일수록 끌리지만, 그 숲길은 사람이 만든다. 이 길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이라 우리가 걸으며 사람이 없다고 좋아 할 수 있는 것이다.
코스 사이의 연결된 길을 찾기 위해 숲을 헤맨 적이 있었다. '길을 찾아 헤맨다고 표현할 때' 우리는 지금의 길에서 다른 길을 찾는다는 전제로 이야기한다. 어쨌든 길 위에 있는 것이다. 장담하건대, 그건 아주 나쁜 상황이 아니다. 정말 나쁜 상황은 내가 서 있는 곳이 길이 아닐 때다. 1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팔과 다리는 가시덤불에 잔뜩 긁혔고 발목은 돌무더기 위에 두껍게 쌓인 낙엽을 밟고 접질렸다. 저쪽 어딘가 길이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제주도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 오래지 않아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작은 키에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들에 가려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인간의 길을 다시 만났을 때, 동행인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이제 다 왔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조금만 더 헤맸더라면 주저앉아 엉엉 울었을 것이면서.
다채로운 맛이 있는 숲 길
비밀의 숲길은 2km 지나 다시 한라산 둘레길로 합류했다. 이제 한동안 넓고 편안한 길이 이어질 것이다. 게다가 내리막길이다. 이승이 오름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한라산 둘레길(수악길)은 넓은 자갈길이지만 높게 자란 삼나무가 적당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한여름에도 다닐만한 길이다.
코스의 마지막은 다시 좁은 오솔길로 이어진다. 돌과 나무뿌리가 길을 덮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조심해야 하지만, 익숙해지면 달리기 재밌는 코스가 되기도 한다. 어디에서 점프 해야 하고, 돌과 돌 사이 어느 지점에 발을 디뎌야 할지를 알고 있으니 오히려 다이나믹하게 달릴 수 있는 구간이 된다. 평평한 평지를 달릴 때는 일정한 속도와 자세로 달리지만, 이런 코스는 변칙적인 리듬을 타야 한다. 몸에는 더 힘을 빼고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아드레날린이 터진다. 위험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고 적응해야 할 대상이다. 위험하지 않은 숲길은 없다.
야생동물들의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작은 습지를 지나면 금세 종점이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사려니 오름을 탐방할 수 있지만,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남쪽의 길은 머체왓 숲을 지나 사려니 숲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보통은 여기서 되돌아간다. 되돌아가는 길은 비밀의 숲길 구간이 아닌 넓은 길만 따라서 가기로 했다. 이 칼럼용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너무 늦었다. 얼마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다.
삼나무 숲 사이를 곧게 가로지르는 길이 이 코스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다. 시작 지점에서 동쪽으로 진입한다면 1km 만에 만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이제 오늘의 코스는 1km 남았다는 뜻이다. 곧은길만큼 가슴도 뻥 뚫리는 포인트인데, 달릴 때는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질 정도다.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에는 삼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모습이 아름다운데 오늘은 천천히 그 풍경을 보며 걸었다.
드디어 숲을 빠져나왔다. 어제 온 비로 대기가 깨끗해져서 그런지 멀리 지귀도와 섶섬이 보인다. 섬의 거리감은 대기 상태에 따라 달리지는 것 같다.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날씨가 좋으면 한라산에서 남해의 섬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역시 숲에 오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인간의 사회가 어찌 됐건 지구의 시간은 자연의 편이고, 결국 숲은 모든 것을 덮어 버릴 것이다. 인간과 무관하게 무한히 이어지는 우주의 시간을 생각하면 오히려 위안이 된다.
*이 글은 <GO OUT> 매거진 2020년 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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