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의 절정, 겨울
제주로 이주할 때 아쉬운 것은 눈이었다. ‘아, 간간히 타던 스노보드도 못 타고, 우리 집 멍멍이도 마음껏 눈밭을 뒹굴지 못하겠구나.’
그리고 제주에서 세 번의 폭설을 경험했다. 해안에는 눈이 귀하지만 내가 사는 제주의 중산간에서는 오히려 서울에서보다 눈이 본다. 심지어 2016년에는 3일 동안 집 안에 고립될 정도였다. 돌담에 쌓이는 눈을 보며 경악하고 감탄하다가 커피를 홀짝거리던 이틀째, 눈보라를 헤치며 인근 숲길을 달렸다. 피할 수 있지만 즐기고 싶었다.
돌덩이 위치도 기억할 만큼 익숙한 숲이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눈에 파묻혀 찾을 수가 없었다. 눈의 무게로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들은 좁은 숲길에 고요한 눈의 터널을 만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낯선 아름다움을 만나면 한숨 같은 탄성만 나온다.
지난겨울, 20명을 인솔하고 한라산 영실 코스를 내려올 때도 그랬다. 어리목 코스를 출발할 때는 비가 쏟아졌고, 고도가 높아지면서 비가 눈으로 변하더니, 윗세오름 대피소를 지나 영실로 내려올 때는 햇살 아래 푸른 하늘과 반짝이는 눈꽃, 하얀 설산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 극적인 날씨의 변화는 잘 짜인 반전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며 나직이 탄성을 뱉기만 하고 도무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시 한라산은 겨울이 절정이다. 고도가 높아 날씨 변화의 폭이 크지만, 그만큼 다양한 눈꽃을 보는 재미가 있다. 크리스마스트리용 나무로 유명한 구상나무는 한라산에서 많이 식생하는데, 고도에 따라 솜사탕처럼 탐스러운 눈꽃이 달리기도 하고, 투명하고 섬세한 상고대가 되기도 한다. 성판악 코스의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면 구상나무 군락지가 나오는데, 눈꽃으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트리 사이를 걸어가는 환상적인 분위기에 취했던 기억이 난다.
12월까지의 이른 겨울에는 한라산에 밤새 내린 눈에 낮 햇살에 대부분 녹아 버린다. 설산을 경험할 수 있는 때를 맞추기 힘든 시기다. 제대로 풍성한 설산을 즐기려면 1월 중순에서 2월 중순 정도가 좋다. 어느 정도의 눈이 항상 있는 편이다. 이 시기에 한라산에 큰 눈이 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다음 날은 한라산 가는 날이다.
겨울 한라산은 어떤 코스를 가더라도 좋다. 다만 난이도가 있으니, 초보자에게는 어리목-영실 코스를, 체력과 경험이 있는 경험자에게는 관음사-성판악 코스를 추천한다.
(여기서 초보자는 당일 코스 산행 경험이 5번 정도는 있는 사람을 말한다. 운동과 담쌓고 살다가 갑자기 겨울 한라산은 무리다.)
겨울산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
마음에 담는 풍경 - 사진 촬영에 집중하다 보면 기억은 사진의 화각에 갇힌다. 풍경뿐 아니라 그 시점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마음에 담고자 한다면 먼저 감각에 집중해 보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느낌, 입김이 나는 온도, 지금 마음의 가득한 감정을 찬찬히 훑어보고 그대로 곱씹어본다. 그리고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풍경과 그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다시 전체적으로 넓게 보기를 반복한다. 이런 방법은 사진이 저장할 수 없는 세세한 감정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한다.
사라진 소리와 새롭게 들리는 소리 - 눈이 수북하게 쌓인 산길은 적막하다. 나무와 바위를 타고 산속을 울리던 새소리는 부드러운 눈이 삼켜 버렸다. 마치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 같은 고요함 속에서 주변 사람들의 대화 소리는 작은 방에서 나누는 듯 또렷하게 들린다. 속 깊은 대화를 하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다. 단조로운 색과 고요함이 서로의 목소리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오히려 편하게 달릴 수 있는 눈길 - 돌길과 돌계단이 많은 산길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 길을 모두 완만한 눈길로 만들어 주는 것이 겨울 산의 장점. 익숙한 산길이라면 푹신한 눈을 믿고 조금 빠르게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것도 재미있다. 계단으로만 이루어진 재미없는 성판악 코스도 눈 온 뒤에는 다닐 만하다. 물론 얼음 구간은 금지!
겨울 산행 준비물과 주의 사항
1. 보온을 위해 옷은 레이어링 시스템으로.
추위와 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여러 겹의 옷을 겹쳐 있는 것이 좋다. 속옷은 땀을 흡수하지 않는 기능성 내의로. 그 위에 공기층을 머금고 있을 수 있는 스웨터나 투습이 잘되는 기능성 티셔츠, 그리고 보온이 잘 되면서 방수 기능이 있는 재킷과 패딩을 날씨 상황에 맞게 겹쳐 입는다. 산행 초반에 몸을 데운 후 땀이 나기 시작하면 외투를 벗어 온도를 조절하자. 땀에 젖으면 체온 조절이 힘들어질 뿐 아니라 우모 패딩은 젖으면 보온 기능을 상실한다. 보온용 모자와 장갑 역시 체온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하다.
2. 아이젠, 스패츠, 방수 등산화, 등산 폴은 안전장비라고 생각하고 준비한다.
아이젠은 겨울 산행에서 눈이 있거나, 없거나 무조건 챙겨야 하는 안전장비다. 눈이 없어도 그늘진 구간은 얼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발이 젖지 않고 눈이 신발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방수 등산화와 스패츠를 착용한다. 양말은 면이 아닌 기능성 등산 양말을 신는다.
어딘가에 보관해 놓은 등산 폴 부품 중 설산용 바스켓을 찾아보자. 등산객들에 의해 다져진 눈길에서 딱 어깨넓이 만큼만 벗어나도 눈밭에 깊게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구간에서 설산용 바스켓이 없다면 등산 폴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3. 호흡과 보온을 위한 마스크 or 버프
차가운 공기가 서리처럼 콧속과 목구멍을 찌르는 느낌이 싫다면 마스크나 버프가 필요하다. 마스크와 버프는 공기를 데워 호흡을 편하지만, 두꺼운 재질은 오히려 호흡이 불편하고 안경에 김을 서리게 하니 얇은 재질을 추천한다.
4. 행동식은 고열량으로, 평소보다 여유있게 준비한다.
에너지젤이나 초코바, 시리얼바 등 열랑이 높은 행동식을 평소보다 여유 있게 준비한다. 체온 유지를 위해 평소보다 많은 열량이 필요하다.
5. 평소보다 일찍 하산한다.
눈길은 속도가 더디게 나니 등산 시간은 평소보다 한두 시간 길게 잡는다. 겨울 해는 짧다. 해 지는 시간을 미리 확인해서 해지기 전에 산행을 마치도록 한다.
6. 준비운동과 마무리 운동
추운 날씨에 굳은 몸은 부상의 위험을 높인다. 천천히 몸을 데우는 준비 운동을 하고 초반에는 속도를 줄여 이동한다. 혹사당한 근육과 관절을 위해 마무리 운동을 하고 통증이 느껴지면 냉찜질을 한다.
*이 글은 <GO OUT> 매거진 2019년 1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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