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되어버린 디지털 중독에서 탈출하기
전능하사 가상 현실을 만드신 알고리즘을 내가 믿사오며,
그 자녀된 우리의 숏폼을 믿사오니,
이는 틱톡으로 잉태하사 인스타 릴스에게 나시고,
엄빠 잔소리에게 고난을 받으사,
스크린타임에 걸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VPN 우회로 다시 살아나시며,
바이럴로 오르사,
전능하신 유튜브의 쇼츠에 저장되어 있다가,
저리로서 노잼과 억텐을 심판하러 오시리라.
인기 급상승 동영상을 믿사오며,
인플루언서들이 서로 협업하는 것과,
잘못 올린 영상을 삭제해 주시는 것과,
해킹된 계정이 다시 복구되는 것과,
영원히 흑역사로 박제되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좋아요♡♥
디지털 중독자의 신앙 고백에 눈살을 찌뿌리는 분들도 계실 줄 안다. 하지만 고백한다. 지난 글에서 알고리즘 감옥에선 학종 탐구 못한다고 호기롭게 조언했던 나 역시 저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아니, 사실 주취자가 구치소 들낙날락거리듯, 매일 야심찬 결심, 금단 증상, 헛된 일탈을 반복하는 디지털 중독자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니라 장담한다. 오늘 아침 버스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인스타그램의 릴스를 넘기던 청년도. 그 뒷 자리에서 게임 스트리머의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던 학생도. 이 글을 보는 여러분도 솔직히 그렇지 않으신가요? 우리 집 첫째 꾸꾸도 마찬가지다.
"꾸꾸야, 너 이거 뭐야?"
꾸꾸의 시선은 내 손가락이 가리킨 자기 노트북 바탕화면의 한 아이콘을 향했다. 그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이건... 뭐더라..."
인강을 듣는 아이에게 간식을 가져다주다 우연히 보게 된 OOO VPN이란 미지의 아이콘. VPN은 직장인들이 외부에서 업무 시스템에 접속할 때나 쓰는 거 아니던가. 유튜브 요금이 싼 국가의 '명예 국민'이 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까지도 들어봤지만, 그게 기껏해야 수행평가나 하고 인강이나 듣는 이 컴맹 아이의 노트북에 있을리가?
일단 모른 척 어깨를 두드려주고 나와 구글에 이름을 검색해본다. 오호통재라. 어둠의 세계로 향하는 뒷문을 여는 열쇠임에 분명하다. 행여나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다시 방문을 열고 무작정 던진 질문. 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맞구나 요놈!
인강을 멈추고 엄마와 아들의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오래간만에. 당연히 처음이 아니다. 그래서 안다. 이런 대화일수록 격식을 차려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음을.
"이번 건 저도 처음 들어보는 거네요. 갈수록 높아지는 기술력에 존경을 표합니다. 이런 고오급 스킬은 어디서 습득하셨나요."
"반 애들이 연령 제한 영상 보는 법 얘기하길래 호기심에 그만…“
컴맹도 프록시 서버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는 요즘 아이들의 호기심. 지난 화에서 말한 듯 관심은 정말 담쟁이덩굴이 맞다. 어떤 작은 틈만 있어도 가지를 펼쳐낸다. 믿기 어렵다면 나무위키에서 ‘스크린타임/무력화’ 항목을 찾아보라.
항목 하나 하나 읽다보면 우리 아이들의 창조적 역량에 정말 입이 딱 벌어진다. 엄마 아빠가 고심해서 설정한 각종 제한을 기어이 뚫어내고야 마는 과제 집착력. 생각도 못해본 수십가지의 우회 방법들에서 창의력이 반짝 반짝 빛난다. 논문을 써도 될 정도로 치밀하고 깊은 사고력. 집단 지성의 힘으로 대동단결하는 협업 능력. 불과 하루 전에 이뤄진 마지막 문서 수정의 내용은 “토스앱으로 유튜브 보기”였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의 탐구력은 지금 이렇게 쓰이고 있습니다.
이렇게나 건재한 알고리즘 감옥. 온전히 자유롭진 못하더라도 갇히진 말아보자고 여러 노력들을 기울여봤다.
핸드폰은 거실에 비치하여 그 매끈하고 물성(物性)에 적게 노출되게 했다. 스크린타임 설정으로 사용 시간도 제어해봤다. 하지만 모두 보기 좋게 실패한 셈이다.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갈 때임을 직감한다. 꾸꾸와의 긴 대화 끝에 함께 유튜브 앱을 연다.
1. 나의 프로필
2. 설정 (톱니바퀴 모양)
3. YouTube의 내 데이터
"YouTube의 내 데이터". 잘 보이지도 않는 설정 메뉴 한 구석에 무심한 듯 적어놓은 저 말. 하지만 이 곳이 바로 유튜브와 구글이 내 데이터를 가지고 알고리즘을 만들어내는 연구실이다.
뚜벅뚜벅 걸어가 'YouTube 시청 기록'이란 팻말을 단 첫번째 실험실 문을 연다. 오늘 점심도 뭘 먹었나 가물가물한 나와 달리, 구글은 내가 기억할 수 없는 먼 시간부터의 나의 시청 기록을 년, 월, 일, 시간별로 차곡 차곡 저장되어있다. 알고리즘이라는 괴물이 먹고 자라는 먹이 저장고인 셈이다.
4. YouTube 시청 기록 '사용 안함'으로 전환
5. '자동삭제' 선택
6. 기록관리에서 전체 기록 삭제
먹이 공급을 원천 차단했다면 이제 뒤로가기를 눌러 두 번째 실험실 'YouTube 검색 기록'으로 간다. 첫 번째 실험실에서 했던 일들을 반복하며 알고리즘의 밥그릇을 시원하게 걷어차준다.
7. YouTube 검색 기록 '사용 안함'으로 전환
8. '자동삭제' 선택
9. 기록관리에서 전체 기록 삭제
세 번째 실험실부터는 유튜브의 화려한 화면 뒤에 숨은 구글의 검은 발톱을 만나게 된다. 웹 및 앱 활동, 위치 기록, 개인 맞춤 광고까지. 알고리즘을 키우고 있었던 것은 나의 무관심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더욱 부지런히 모든 기록을 삭제하고 이후 저장을 금지한다.
10. '웹 및 앱 활동' 저장 안함 + 자동 삭제 + 모든 활동 삭제
11. '위치 기록' 끄기 + 자동 삭제 + 모든 기록 삭제
12. '개인 맞춤 광고' 사용 중지
이를 모두 끝내고 이제 다시 유튜브 앱을 다시 열면 짜잔! 초기화된 홈화면이 나온다.
로그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독하는 크리에이터의 영상은 여전히 구독탭에서 볼 수 있다. 또 필요한 영상이 있다면 검색을 통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다만 내가 보던 영상부터 내가 좋아할 것같은 영상까지 총천연색의 유혹들을 펼쳐보이며 손짓하던 알고리즘이 사라졌기 때문에 목적있는 유튜브 사용이 좀 더 가능해진다. 알고리즘의 화려한 성채는 여전히 굳전하지만, 이제 그 높은 성벽 옆에 작은 쪽문 하나가 생긴 셈이다. 이제 꾸꾸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나올 수도 있다.
기술과 함께 하는 삶은
'필요'에 따른 '선택'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디지털 네이티브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이 깨닳아야할 가장 첫번째 명제라 믿는다. 기술의 명과 암을 끊잆없이 경계하고, 자각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솔선수범해야 할 우리 어른들이 먼저 시작해주어야 할 책무라 믿는다.
꾸꾸에게 다시 핸드폰을 건네주며 어깨를 두들겨준다. "니가 고생이 많다." 기껏해야 TV, 오락실, 만화방 및 비디오대여점이 최대의 적이었던 엄마 아빠의 세대보다 훨씬 더 벗어나기 어려운 멍에를 짊어진 21세기의 아이들. 이들에게 '한눈 팔지 말고 공부만 해'라고 말하는 건 어찌보면 참 불공평하고 잔인한 일이다. '하지마!'만으로는 아이들을 도울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The truth is, you don't break a bad habit;
you replace it with a good one.
나쁜 습관은 없애는 게 아니에요.
좋은 습관으로 대체할 뿐이죠.
미국의 작가 데니스 웨이틀리(Denis Waitley)의 말처럼, 나쁜 습관을 없애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좋은 습관이 들어가 나쁜 습관을 밀어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숏폼과 릴스를 대신할 좋은 정보와 활동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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