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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눈길 Nov 18. 2024

서울대 합격생들의 생기부엔 ○○가 있다

GPT에게 없는 바로 그것은?

“쌤! 일타 적중 성공!”

어제 K대 논술을 다녀온 녀석이 너스레를 떨며 다가온다. 

“어제 논술 제시문에 ‘프랑켄슈타인’이 딱! 완전 반갑더라고요!” 

“오, 그래? 쟁점은?” 

“과학 기술의 가치중립이었는데, 쌤 수업에서 계속 다뤘던 내용이라 뭐, 가볍게 썼어요!”

맞다. 과학 윤리는 우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며 다뤘던 많은 주제들 중 한 축이었다. 아이들은 200년 전에 쓰여진 책 속에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과학 발전의 명암을 발견하곤 놀랐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들에 대해 고민했다. ‘지식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전능의 추구는 정당한가’,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등의 논제에 관해 글을 쓰며 자연스레 인간 실존에 내재된 휴브리스(hubris)를 인정하고 생명공학 윤리의 필요성에 대해 토론했다. 그 후 논술 고사장에서 그 수업의 텍스트와 주제를 그대로 만난 셈이니, 그 반가움을 알만하다. 

책의 힘이다. 독서의 힘이다. 

읽으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생각하니, 그때 보이는 세상은 전과 같지 않음이다. 



“감히 이렇게 말해볼까요.
서울대학교는 어느 학교보다도 책 읽는 사람을 환대하고,
또 그런 사람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선발하는 학교라고요.” 

서울대학교 입학본부에서 펴낸 『서울대학교 학생부종합전형 안내』 중 한 대목이다. 

“독서는 모든 공부의 기본입니다”, 서울대는 늘 그렇게 말해왔다. 

2023학년도 입시까지 서울대는 아예 자소서에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책을 3권 소개하고 그 이유를 기술하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문항이 학생 평가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비슷한 내신으로 같은 학과를 지망하는 아이들인데도 그 문항 초안을 보면 누구는 떨어지고 누구는 붙겠구나를 짐작할 정도니 말이다. 물론 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조언을 받아 그럴싸한 책들을 골라오곤 했다. 하지만 급조는 쉽지 않았다. 같은 책을 읽어도 그 독서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다 보면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보였다. 물론 그 내용까지 외부 컨설팅의 도움으로 적어오는 애들도 있었다. 하지만 생기부에 기록된 3년간의 독서활동상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설득력을 잃곤 했다. 그래서 아이들의 서울대 준비에서 가장 먼저 점검하는 게 바로 1학년 때부터의 독서 기록이었다.

2024학년도 입시부터는 생기부의 독서활동사항이 반영되지 않고 자기소개서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서울대는 여전히 독서가 중요하다 말한다. 

“독서 활동목록과 자기소개서가 없어도 지원자들이 독서를 통해 쌓아 올린 지적인 역량은 학교생활기록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책은 여전히 중요한 배움의 도구이며 독서로 쌓아 올린 힘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 『서울대학교 학생부종합전형 안내』 중

그래서 요즘 아이들 지도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얼마나 독서를 생기부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가이다. 수업 및 평가에 책 읽기를 들여오고, 독서를 바탕으로 활동을 진행하며, 후속 활동 역시 꼬리물기 독서로 이어지게끔 유도하고, 이 모든 과정을 생기부에 기록한다. 읽기를 통해 생각하는 힘, 글쓰기 능력, 전문 지식, 의사소통 능력을 쌓아나간 이력을 보여주어 아이의 탐구력을 증빙하는 것이 최대 목표이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 정말 책 안 읽는다. 아니, 책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더 손쉽고 근사한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하아, 고 녀석 GPT. 요즘 아이들 평가 과정에선 그 녀석과의 은밀한 거래 흔적을 찾아내는 데 상당한 노력을 쏟곤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녀석은 특유의 텅 빈 선물 상자 같은 말투가 있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청담동, 람보르기니, 에르메스 등의 단어로 가득 찬 대화를 하길래 대단한 사람인가 싶은데, 막상 귀 기울여 들어보면 다 친구 집, 아는 사람 차, 온라인 친구의 가방에 대해 얘기할 뿐인 사람. GPT가 써준 탐구는 그렇게 다 티가 난다. 겉으로는 세상 공부를 다 해낸 것 같은데 잘 읽어보면 “그렇다고 합니다”에 그친다. 그런 활동지를 제출한 아이들에겐 바로 물어본다. “이거 너가 쓴 글 맞니?” 동공이 흔들리지 않는 대담한 녀석들에겐 일부 내용에 대해 질문해 보면 바로 말문이 막힌다. 읽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지 못하면 생각할 수도 없다. 

단순히 부정직 혹은 불성실하다는 불만이 아니다. AI의 환각(hallucination)은 아이에 대한 평가자의 신뢰 자체를 무너뜨린다. 지난 학기 서우가 제출한 탐구활동지의 내용이 한 예다. 

Mark Twain의 ‘Pudd'nhead Wilson’을 읽고 사회적 풍자로서의 문학에 대해 탐구했다. 선한 마음씨를 가진 등장인물 Colin이 ‘Those negros need their masters’라고 말하며 노예제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부분에 충격을 받고, 작가가 정말 노예제를 옹호하는 걸까 고민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를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무구한 소년으로 설정함으로써 사회적 편견이 개인의 인식을 마비시킨다는 주제의식을 부각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회적 방법을 통해 동시대의 통념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문학은 부당한 사회에 맞서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서우야, 선생님은 이번 탐구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구나.”

“네? 왜요?”

서우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아마 지금 독자분들의 표정도 그와 비슷하리라. 이렇게 훌륭한 탐구를 왜? 서우의 탐구는 나의 팩트 체크에 걸렸다. Mark이 ‘Pudd'nhead Wilson’이라는 책을 쓴 건 맞다. 하지만 그 책에는 Colin이란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당연히 ‘Those negros need their masters’라는 표현 역시 책에 없는 내용이다. 

이 말을 들은 서우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GPT가 확인해 준 내용인데요? 심지어 유료버전인데.”

머릿속에 장면이 펼쳐진다. 아이가 프롬프트창에 ‘Mark Twain 작품 중 사회적 풍자가 뛰어난 작품 소개해줘’라고 타이핑했을 때 GPT는 해당 작품을 소개해줬으리라. “이 작품에서 특히 문학적 장치가 돋보이는 장면을 소개해줘”라고 했을 때쯤 GPT의 환각은 시작되었을까? 분명한 점은 이 아이는 책을 읽지 않았다. 그래서 귀중한 평가 기회를 날려버렸다.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이게 만약 생기부에 기록되었다가 서류 평가하는 입학사정관의 눈에 띄었다면? 사실 확인을 위해 던진 면접 질문에 자신 있게 이 내용을 바탕으로 대답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할 뿐이다. 


서울대 가고 싶으면 책을 읽어야 해. 아이들은 수긍한다. 하지만 독서 과제를 주면 GPT에게 간다. GPT의 요약은 훌륭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잘 정리된 미사여구에는 고민의 흔적이 없다. 내가 지도해 온 서울대 합격생들의 탐구 활동지는 정반대였다. GPT라면 하지 않았을 방황의 흔적으로 가득 차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국제사회의 외교적 협력에 대한 개인적 화두를 품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면서 이기적인 개체들에게 어떻게 이타주의적 행동을 유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도킨스가 책에서 언급한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착안하여 해당 모의실험을 연구한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를 읽으며 이타주의적 협력의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이기적 개인들이 팃포탯 전략에 기반하여 상호작용한 결과 호혜주의에 입각한 협력이 가능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당 도서에서는 상대국의 협력을 이끌어낼 실무적 외교 전략 수립의 원리까진 찾아볼 순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추가 조사를 한 결과 ‘양면게임이론’의 ‘윈셋(win-set)’에서 공존공영 시스템을 위한 협력적 팃포탯 전략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벽에 부딪혀 고민한 흔적.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책을 꺼내본 좌절의 기록. 책장을 넘기며 스스로 발견하고 만족하지 못해 또 다른 책을 꺼내 답을 찾은 과정의 누적. 혼돈 속에 길을 내기 위해 노력한 여정이 주체적인 학생의 초상화이다. GPT가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영역이다. 

GPT는 잘 정리된 지도를 쥐어준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필요한 것은 나침반이다.
끊임없이 흔들리며 자신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나침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와 사유만이 그 나침반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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