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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눈길 Nov 04. 2024

알고리즘 감옥에선  학종 탐구 못해요

탐구의 시작은 자기 문해력입니다

“선생님, 그 책 재밌어요. 읽어보세요.”


체험활동 중 들른 도서관에서 내가 살펴보던 책을 보고 진원이가 한 말이었다.


“그래? 어떻게 알아?”

내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의아함의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그 책은 2차 세계대전의 발발부터 종전까지의 경과를 상세히 기록하고 전쟁사의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족히 500쪽은 되어 보이는 분량. 그 책은 라면 받침으로도 적절치 못했다. 차라리 흉기에 가까웠으리라.

“저 이 책 몇 번씩 봤는걸요. 2차 세계대전을 이해하는 데 이만한 책이 없어요.”


세상에. 알고 보니 진원이는 전쟁사 ‘덕후’였다.

세상의 모든 전장은 그 아이의 상상 속 놀이터였고, 진원이는 유럽 정복에 나선 나폴레옹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통해 그의 정신적 영토를 끊임없이 확장해 왔던 것이었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라 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증명하듯, 그 아이의 영민한 머릿속에는 동서양을 아우르고 고금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인류학적 기록들이 마치 백과사전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진원이는 이를 활용하여 팝콘같이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수업을 풍성하게 만들곤 했다.

언어 소멸에 관한 수업에서 방언의 가치를 토론할 때다. 진원이는 태평양전쟁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 나바호(Navajo)족의 언어가 암호 체계로 활용되었던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하며 언어적 다양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또한 헤밍웨이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작가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잃어버린 세대‘ 문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 탐구하고 인상적인 발표를 해냈다.


진원이가 내신 대비 좋은 합격 결과를 전해왔을 때 나는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잘 키운 덕후 하나 열 범생이 안 부럽구나.“



지난 글의 마지막에 독자님들이 생각하는 진원이의 모습을 댓글로 말씀해 달라고 부탁드렸더랬다.

고맙게도 많은 작가분들께서 댓글을 통해 각자의 생각을 나눠주셨다.

"일상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주제를 의문을 가지는 것부터가 시작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어봅니다" (@다정한 태쁘 작가님)
"여러 시도를 해보는 수밖에 없겠죠? 이것저것 경험하다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나갈 거라고 믿어요!" (@온리 작가님)
"자신의 관심사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탐구가 필요한 것 같아요." (@따뜻한 공간 작가님)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탐색하는 건 나이를 불문하고 일생의 화두인 거 같아요." (@뵤뵤리나 작가님)
"궁금한 거 찾고, 탐구하고 연결하는 힘은 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목인 것 같아요." (@어제 작가님)


모두 입을 모아 탐색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세대를 불문하고 추구해야 할 가치임을 말씀해 주셨다. 작가님들의 댓글을 보며, 관심의 중요성은 단지 입시에서 그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결국 좋은 탐구는 자기 이해에서 출발한다.

'너 자신을 알라( Γνῶθι σαυτόν)'라는 말은 주제 파악이나 하라는 핀잔이 아니다. ‘나다운 게 뭔데!?’라는 클리셰로 받아치고 웃어넘길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새겨 넣을 만큼 소중히 여긴 이 금언은, 모든 앎이 자기 인식에서 시작함을 일깨운다.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면 신의 가호마저도 무용하다는 깊은 통찰이 담겨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소크라테스도 울고 갈 만큼 복잡한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미디어 문해력, 통계 문해력, 디지털 문해력 등, 새로운 인식 능력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시대다.

그러나 이 모든 문해력의 중심은 여전히 '나'라는 텍스트다.
자기 문해력(self-literacy)은 모든 이해의 출발점이자 궁극적 지향점인 것이다.
 


자기 이해가 단단히 뿌리내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바깥세상으로 돌린다.


관심이란 마치 담쟁이덩굴과 같다.

작은 덩굴손 하나로 시작해 벽면 전체를 뒤덮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듯 호기심의 영역을 확장해 간다. 담쟁이가 자연의 시간을 성실하게 잎새에 기록하듯, 이런 아이들은 배움의 여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순간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 새로운 지식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차곡차곡 쌓이며, 기존의 관심사와 만나 독창적인 해석으로 피어난다. 어떤 높이의 담장도 결국 넘어서는 담쟁이처럼, 이들은 학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통합적 시각을 형성한다. 사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낸 담쟁이 벽이 지나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듯, 이들의 융합적 사고는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이처럼 성장하는 학생들에게는 방향을 제시하고 깊이를 더하도록 돕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자기 이해가 부족한 아이들의 내면은 텅 빈 벽과 같다.

그 벽에는 자신의 불안한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맴돌 뿐이다. 이런 아이들은 나아갈 곳을 찾지 못하는 막막함에 방황한다. 담쟁이가 가지를 뻗어가듯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피워내지 못하고, 사시사철 회색인 콘크리트 벽처럼 성장의 여정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처럼 자신의 관심사를 찾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그 어떤 외부의 노력도 한계가 있다. 교사의 헌신적인 지도도, 애타는 부모의 조언도, 고가의 컨설팅도 진정한 호기심을 심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심이란 씨앗 자체가 없는 마음이 어디 있겠는가.

‘호모 쿠리오수스(Homo Curiosus)’라는 표현처럼, 호기심은 인간의 본질적 동력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씨앗을 발견하기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짧고 강렬한 콘텐츠가 주는 도파민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관심사는 더 이상 능동적 탐색의 대상이 아니다. 스크린을 통해 끊임없이 밀려드는 자극의 홍수 속에서, 이들은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세계가 확장된다고 착각한다. 압축된 쾌감을 즉각적으로 제공하는 숏폼이 아니라면 이들의 호기심은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다. 관심의 표현마저 '좋아요'나 ‘하트’ 버튼을 누르는 피상적 행위에 그치고 만다.

이제 ‘발견’, ‘사유’, ‘음미’ 등은 ‘노잼’의 고급 표현일 뿐인 걸까?

‘어려운 것도 한참 씨름하다 보면 풀리는 맛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진지충‘일 수밖에 없는 걸까?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있는
우리 아이들의 관심을
우리는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지난 글에서 생각하셨던 진원이의 모습, 실제로 만나보니 어떠신가요?

숏폼의 범람과 알고리즘의 함정과 어떻게 싸우고 계신가요?

관심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소개해주세요.

다음 글에서 함께 나누며 우리 아이들을 도울 방법을 고민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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