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 파밍용 독서가 필요한 이유 미리 엿보기
“엄마, 꼭 이렇게까지 읽어야 해? “
예상했던 반응이다. 마음에 드는 책은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걸 좋아하는 꾸꾸. 그런 아이에게 책을 읽으며 중요한 거 표시하면서 읽은 후 마인드매핑으로 정리해 보자는 제안은 마치 신나게 달리려는 말에게 재갈을 물리는 일 같으리라. 사실 나 역시 이런 과제에 주저함이 있었다. 독서의 즐거움을 뺏는 것 같은 미안한 마음 말이다. 독후 활동 좋은 줄 알면서도 억지로 시키진 않아 왔던 이유다.
하지만 이제는 더 물러날 곳이 없다. 고등학교 입학 후 몰아칠 각종 활동의 홍수들을 생각하면 말이다. “쌤, 중간고사 끝난 게 어젠데 수행이 벌써 이번 주만 3개예요.” 다크서클이 코끝까지 내려온 아이들의 울상에만 그치랴. “선생님, 애가 요즘 수업 발표 준비에 수행 준비에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하네요. 새벽에야 쓰러진 아이 깨우다 보면 아침마다 전쟁이에요. “ 학부모님들의 하소연까지. 페이지 넘기기와 감동에 그치는 독서 말고 다른 종류의 독서가 필요한 이유다.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 듯,
모으고 쌓아 필요할 때 뽑아 쓰는 독서를 시작해야 한다.
문어 입이 된 꾸꾸를 앉혀놓고 게임의 비유를 들어본다.
“너 며칠 전 게임하면서 그러더라, 게임은 템빨이라고. “
“그럼! 직업빨, 컨트롤빨 다 좋지만 좋은 아이템은 못 이기지. “
“그치? 근데 말야, 고등학교 생활도 템빨이야.”
“엥?”
어리둥절해하는 꾸꾸를 옆에 앉히고 학교알리미 사이트를 열어 얼마 전 고등학교 입학 응시원서에 썼던 학교를 검색한다. 평범한 사립 일반고. 남학생들만 있어 수행평가 등은 평이할 것으로 예상된다. 학교 이름을 누르면 나오는 각종 정보의 하단에서 '공시정보'를 찾고, '학업성취사항' 탭에서 '교과별(학년별) 교수ㆍ학습 및 평가계획에 관한 사항'이라는 항목에 업로드된 자료를 다운로드한다. 올해 해당 학교에서 개설된 모든 과목의 수업 진도, 지필 고사 및 수행평가에 대한 계획이 담겨있다. 물론 실제 평가 전 학생들에게 안내되는 자료는 아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까지 다 알긴 어렵지만, 대강 어떤 수행평가를 하겠구나, 예상해 볼 수 있다. 꾸꾸와 함께 수행평가 항목에 적힌 평가 내용과 방법을 살펴본다.
"엄마, 통합사회 평가는 나 올해 했던 거랑 비슷한데? '현대 사회의 인권 침해 사례를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다각적으로 모색하여 서술할 수 있다.' 한국사도 마찬가지네. '자신이 선정한 역사 주제에 관하여 적합한 자료를 수집하여 비판적으로 분석 종합한다.' 이거, 뭐 별거 없네!"
"그래, 큰 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제일 큰 차이는 평가 내용이 아니라 평가의 결과야. 중학교 수행은 점수 잘 받아서 성취도 A 받고 나면 끝이었잖아. 고등학교 수행은 그 내용에 대한 선생님의 평가가 생기부에 적혀. 그리고 대입에서 너를 평가하는 근거 자료로 사용돼. 너가 어떤 분야에 관심이 많은지, 그 분야에 대한 궁금증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해결해 보려 노력했는지, 그 결과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관련 문제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결책도 제안할 수 있는지 등을 볼 거야. 그때 바로 너가 했던 수행에 대한 선생님의 평가를 참고하는 거야."
"엄마, 근데 나는 알다시피 이과잖아.
사회는 내 분야가 아니니 상관없잖아?"
대입의 평가 방식을 잘 알지 못하고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한 아이들이 가장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다시 인터넷을 열어 한양대학교 입학처에 간다. 학생부종합전형의 상세한 평가 방법은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큰 얼개는 거의 비슷하니 잘 설명된 자료라면 어느 대학이든 괜찮다. '수시 모집요강' 파일을 다운로드하고, '학생부종합평가 절차와 방법' 부분을 꾸꾸와 살펴본다.
"엄마, 그럼 횡단평가라는 게 여러 선생님한테 다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어. 그런데 중요한 건 그냥 다 좋다가 아니야. 너가 어떤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이 고등학교 3년 간 모든 활동에서 일관되게 다 드러날 거라 기대한다는 거야. 너가 논리력이 뛰어난 아이라면 1학년 때 국어 수업에서도 그런 모습이 보일 것이고, 2학년 동아리 활동에서도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다회, 다분야, 다년. 동일한 역량의 평가가 많을수록, 여러 과목과 활동에서 나올수록, 매 학기마다 거듭해 나올수록 좋다는 거야."
이어서 중앙대학교 입학처를 열어 '학생부전형 가이드북' 자료를 함께 본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학생부전형에 대한 가이드북을 제작하여 학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진로 역량'에 대한 설명을 꾸꾸와 함께 본다.
"엄마, 전공 옆에 괄호하고 계열이라고 쓴 건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 그 전공이 속한 계열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 있어도 괜찮다는 거야. 너도 아직 가고 싶은 학과는 못 정했잖아. 정했다 해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고. 이렇듯 진로 탐색 과정에 필수 불가결한 고민, 시도, 실패, 전환 등을 모두 인정한다는 거야. 다만 인문 계열, 사회 계열, 혹은 공학 계열 등 해당 전공이 속한 계열 안에서 어떤 탐구를 했는지를 눈여겨보겠다는 거지. 그런데 한 해에 듣는 과목 중 공학 관련 과목은 많아야 한 두 개밖에 없잖아. 과학 동아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봤자 하나 추가지. 그렇다면 다른 교과활동에서도 공학 관련 탐구가 나와야 아까 말한 '다회, 다분야, 다년'에 유리하겠지."
"헐, 통합사회에서 공학 분야를 어떻게 탐구해? 인권 문제 해결이랑 공학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한국사에서 수학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보여줄 건데?!"
"그래서 바로 지금 우리가 하는 책 읽기가 필요한 거야. 둑 쌓고 저수지 만드는 독서!"
꾸꾸가 들고 왔던 책을 펼쳐 목차를 훑어본다. 다양한 분야에 숨겨진 수학적 원리를 설명해 주어 수학 분야 전공소개서로 골라주었던 책이다.
"자 여기 봐, '고려왕릉에서 찾는 금강비', '석굴암을 세운 무리수의 개념", 더 읽어볼까?"
"헐, 진짜네!"
물론 이 정보들, 검색을 통해서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간고사, 모의고사, 기말고사, 수행평가, 각종 대회 및 활동들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고등학교 생활에선 시간이 생명이다. 게임도 결국 누가 먼저 좋은 아이템을 꺼내느냐가 관건 아니던가? 수행평가 때마다, 수업 발표 때마다, 동아리 활동 때마다 주제 뭘로 정하지 고민하며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하는 학생들은 자신의 역량을 다 보여주기 어렵다. 조급한 마음에 아무 주제나 고르다 보면 나중에 진학 학과를 결정해도 계열적합성을 맞추기 어려워져 후회하게 마련이다. 그런 상황엔 어른들의 도움도 유효하다. 하지만 고3 담임을 해보면 안다. 면접에서 그렇게 도움받은 활동에 대해 제대로 답변할 수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는 걸.
하지만 중3 겨울방학에 선행 독서를 해둔 아이들은 당겨진 활시위처럼 빠르게 나아갈 수 있다. 주요 관심 분야를 설정하되, 이를 다양한 과목 및 분야와 연계하여 탐구할 소재들이 준비되어있기 때문이다. 독서로 일군 템빨은 생명같은 시간을 아껴 내신 대비와 수능 준비 등 가장 중요한 입시 역량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꼼꼼히 읽지 않아도 괜찮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다만 수학의 원리와 개념을 통해 다양한 분야를 바라보는 시선을 익혀두는 거야. 그러다 이렇게 유용해 보이는 것, 흥미로워 보이는 것이 있으면 표시해 두었다가 다 읽은 후 마인드맵으로 정리해 둬. 책엔 없는데 너가 궁금해진 것이 있으면 함께 적어보고. 나중에 수행평가 때가 오면 쓱 꺼내서 살펴보며 좋은 소재를 골라볼 수 있게. 게임으로 치면 '쿨타임'을 이용하여 '인벤토리'에 '아이템' 채우는 거야."
"오 엄마, 그럼 나 오늘 사실 이 책 읽다가 양자역학에 숨어있는 수학 부분에서 막혔는데 대칭수?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더라구. 그럼 만약 그걸 수학 과목에서 탐구하면 물리에 대한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 건가?"
"그런 식이지, 벌써 아이템 하나 파밍 성공했네! 역시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 개를 깨우치는 기특한 꾸꾸!"
파업을 선언하고자 왔던 꾸꾸는 도통 이긴 건지 진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책을 들고 방으로 돌아가며 외친다.
"게임도 템빨! 공부도 템빨! 기특한 꾸꾸는 이제 템 파밍하러 갈게!"
"책에서 템 파밍한단 말이지?"
"글쎄에?"
에그, 첫 술에 배부르랴. 책은 그저 넘기는 것인줄만 알던 아이의 마음에 새로운 씨앗을 심은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일은 다 되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이고, 시작이 반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