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에 관하여 떠오른 단상.
영화평은 아닙니다. 영화 <다음 소희>(정주리 감독 2023)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대개 육체적 노동만 '노동'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건설공사 현장의 '노가다'(막일)라는 육체적 노동을 가장 힘든 일의 하나로 여기기도 했고, 여느 생산 공장에서처럼, 조립 라인의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 앞에서, 생산 기계 앞에서 일하는 생산 현장직의 육체노동만 "힘들고 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공장"에서 그 '힘들고 험한' 일을 하지 않기 위해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도 무리하게 빚을 내고 대출을 받아서라도 학비를 마련하여야 했고 대학 졸업장을 받기 위해 무조건 공부를 해야 했다. (일부는 아들자식의 대학진학을 위해 집에 누나나 여동생은 학업과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 등 산업현장으로 돈을 벌러 나가기도 했다.)
한여름에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내근직 고객상담 또는 판매, CS콜센터나 화려한 백화점 매대, 세련된 사무실의 화이트 칼라(white-collar) 사무직 등을 소위 '정신노동자'쯤으로 여기고 그 생산공장 현장의 '육체노동자'(blue-collar)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동강도가 낮은 것처럼 여기곤 했었다.
그러나 모두 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기름때 묻은 공장의 청색 작업복만 흰색 셔츠(shirts)로 갈아입고 있을 뿐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힘들고 험한' 일을 하는 그저 같은 "노동자"일 뿐이다.
문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근무시간 이후에도) 퇴근 후에도 여전히 직장일로 인한 어떤 지속적인 '감정노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한 그 감정노동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계속 머릿속에 남아 맴돌고 있으며 (심지어 꿈속에서도) 다음날 아침까지 그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힘들어하고 그 아침 직장으로 향하는 출근길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야외 공사 현장이든 사무실이든 우리는 최소한 퇴근시간 이후에는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 단적인 예로 퇴근 시간 이후에는 전화, 문자 그리고 여타 메시지 등으로부터 혹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직장 업무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집안일, 가족 경조사 또는 여타 친구, 지인 관계 등 사적인 일들로 엄청난 또 다른 감정노동과 감정소모를 매일 하고 있으므로 최소한 그 직장으로부터의 연장된 감정노동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타 일부 선진국들의 '발달된' 노동법 운운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도 (멕시코 등 중남미에 이어) 가장 긴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연간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 중 하나인 독일은 1,349시간인 반면, 한국은 1,910 시간이라고 한다.(Source : OECD 2022)
두 나라를 단순 비교하면 한국은 일 년에 561시간 더 일하는 것이며, 이를 하루 8시간의 근로시간으로 나누어보면 한국 근로자들은 연간 "70일"을 더 일하는 셈이다.
세계적인 선각자들과 심리전문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소위 "행복의 열쇠"로 '남을 돕는 것'을 통한 만족감을 제일 으뜸으로 꼽고 있는데, 우리는 일상 속 끊임없는 감정소모로 남을 돕기는커녕 과연 어려운 이웃의 처지에 대한 조금의 공감(empathy) 여력이라도 남아 있기는 한 걸까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연민의 감정이나 동정(sympathy) 조차도 메말라 가는 이 사회에 그저 '사회 구조적' 문제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심각한 사태(事態)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사태가 지속된다면 어쩌면 종국에는 우리는 (은연중에도) 남의 불행한 일이나 남의 억울한 문제에는 더욱더 소극적이거나 숫제 애써 피하려고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필자 또한 이 사회에 "다음 소희"는 더 이상 없기를 간곡히 바라며 짧은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