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heals all wounds."라는 격언에 이유 있는 반론
누구에게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구에게는 애틋한 그리움 가득 찬, 아쉽지만 한편으론 흐뭇한 감흥일 수도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기억할 수 있는 (기억해 낼 수 있는) 범위 내의 과거 시간 중에 어떤 순간들은 세월이 한참 지나 다시 되돌아보니 "Die gute alte Zeit"(the good old days)라는 "좋았던 옛 시절"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도 과거가 모든 사람들에게 다 그렇게 좋았던 옛 시절로만 비치거나 기억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에 관해 필자 나름대로 짧게나마 개인적인 단상을 글로 한번 써보려 한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쓰기를 하면서 최근에 읽은 글 몇 편에는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글들도 있었다. 처음 서두부터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지막까지 천천히 따라 읽다가 끝내는 울컥하며 눈물짓고 말았다. 슬픈 개인사와 고통스러운 상실감(喪失感)에 관한 글이었다.
콧물을 훌쩍이며 어느새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면서, 아.., 이 글을 직접 쓴 작가님은 정말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아니, 이 글을 써 내려가기 전에 몇 번을 망설이고 또 망설였을까 하고 생각하니 그 글을 쓴 작가님의 마음에 필자도 너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울먹이며 타이핑했을 그 작가님을 생각하니 지금 또다시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고 진심으로 마음이 아파 온다.
저마다 살아가면서 겪는 불운한 경험과 고통은 글을 읽는 다른 누군가에는 공감과 감동뿐만 아니라 똑같이 나약한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연민(憐憫)과 어떤 알 수 없는 미지의 '인간애'(人間愛)를 느끼게 까지 만드는 것 같다.
지난번 다른 글에서도 적었지만 필자는 개인적인 불운한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상세히 적지는 못한다. 지금 처한 나름의 사정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직 그만한 용기가 없어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혹자는 지나간 학창 시절을 그리워하고 유년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파 하는 마음도 있다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과거로 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과거에 상처 입은 기억들을 애써 되새기지 않거나 잊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옛 친구는 보고 싶어도 옛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불운한 일도 겪었고 또 후회스러운 과오(過誤)도 있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새로 깨닫고 배운 것도 많아 지금 필자의 모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경험들이 없었더라면 필자는 지금 보다 더 못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한 번쯤이라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여전히 없다. 타임머신(time machine)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날 수도 없지만 행여나(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갈 수 있다 치더라도 내가 혼자 마음대로 내 과거사를 고칠 수도 없고 다시 바로 잡을 수도 없다. 꼭 물리적, 과학적 사실이나 진리(truth)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필자의 어떤 '정서적 의지'가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만큼 유년 시절에 좋았던 기억보다는 안 좋았던 기억이 더 많았기 때문일 거야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좋았던 기억도 잊기 어렵지만 정말 두 번 다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아주 안 좋았던 기억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일을 겪으면 말 못 할 고통과 함께 엄청난 슬픔과 상실감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한다. 주변에서는 다 "세월이 약이다"라며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좀 괜찮아질 거라고 한다. 그렇지만 당사자들에게 과거의 아픔이 괜찮아지는 법은 없다. 다만 괜찮은 척할 뿐이지. 잊히는 것도 없다. 좀 잊힌 채 하는 것뿐이지. 우리에게 이미 한 번 일어난 일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인식을 왜곡시킬 수 없듯.
그래서 그 아픔과 슬픔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 아주 깊이 자리하여 불쑥불쑥 다시 떠올라 가슴 아프게 한다. 그러니 엄격히 말하자면, 결코 "세월은 약"이 아닌 것이다.
정신적 트라우마 같은 불운한 경험에 의한 장애나 이상 심리,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에 관한 상담과 전문적이고 세밀한 진단은 정신치료 전문가, 의사들의 영역이겠지만 우리는 꼭 병원을 안 가도 어떤 병들은 아프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채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병들고 아프고 상처받은 후 아물지 못하고 남아있음은 대개 스스로도 느낄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어쩌면 제일 먼저 잘 안다.
병원 가면, 의사의 첫 질문이 대개 이렇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이다. 내가 어디가 아프다는 말을 먼저 해야 안다. 물론 의사의 전문적 진료나 처방을 폄훼(貶毁)하는 말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말의 행간(行間)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도 스스로 겪고 있는 과거로부터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관리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어떤 불운하고 안 좋은 경험과 고통에 의한 트라우마 같은 심적 장애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치료받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와 다가올 미래엔 그런 유사한 경험을 겪더라도 굳건히 이겨낼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견뎌낼) 의지를, 그리고 때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정서적 감정의 힘도 길러야 한다. (이 대목에서, 힘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데는 무조건 "종교가 약이다"라는 말은 아니다.)
지나고 보니 그냥 그런대로 다 살 만했다고 느끼는 것은 그저 지금 처한 관점에서만 과거를 바라보거나 또는 편리하게 사후 편집, 적용하는 "선택적 기억"의 오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의 과거를, 과거에 관한 기억과 그때의 남아있는 감정을 대할 때도 왜곡 없이 진솔하고 진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나 그 진위 여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소위 "전문가들에 의한" '스트레스와 고통'에 관한 통계적 진단 수치라고 알려진 (믿거나 안 믿거나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들 각자의 몫임을 밝혀두며) 사례들과 관련하여 과거의 고통 중 그 고통의 크기를 구분하고 순위를 매긴 주장을 살펴보면서 이 글을 이만 마무리하고자 한다.
가장 큰 고통은 여기에 적고 싶지 않다. 그건 필자에게도 너무 힘든 일이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그러하리라 생각되어 적지 않는다. 실제로 그에 해당되는 당사자가 독자분들 중에 있을 수도 있으니 적지 않겠다. (독자분들이 지금 생각하시는 그것이 맞다.)
두 번째는 '이혼의 고통'이라고 한다. 누구나 이별은 슬프고 힘든 일이지만 오래 함께 살았든, 아니면 짧게 몇 년을 살았든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통해 강제성을 갖는 법적 혼인 관계를 인위적으로 (또다시 법적으로) 종료하는 법적 이혼이라는 행위와 절차는 경험해 보지 않은 분들은 짐작조차 못할 정도로 몹시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고 한다.
정말 이혼한 분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은 분들이라고 한다. 그 단란했던 결혼이 (위자료, 친권과 양육권 소송들을 거치며,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하나까지" 나누려 드는 시시비비부터 시작해서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잔혹한) 진흙탕 같은 이혼 과정으로 변하는 이야기 사례들은 다른 데서도 흔하지만 여기 브런치스토리 내에도 이미 자주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세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배우자의 사망'이라고 한다.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란 뜻으로, "남편이 죽고 홀로 된 여자"를 이르는 '미망인'(widow)이라는 용어가 지금 2023년 현재의 시대정신에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표현을 몰라 여기 그냥 적는다. "아내를 잃고 홀로 지내는 남자"를 뜻하는'홀아비'(widower)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서로 사랑하고 결혼을 할 정도로 (그리고 아이도 함께 낳고),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이혼도 그만큼 쉽지 않지만, (이혼하지 않고) 잘 살다가 갑자기 겪게 된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死別)이 주는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감히 가늠할 수 조차 없으리라.
그다음 네 번째가 '부모의 사망'이라고 한다. 부모님 중 한 분이 먼저 돌아가실 때 우리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큰 슬픔을 느낀다고 한다. 동물적 본능 운운하기에 앞서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인간적인 애정, 따뜻하게 안전하게 보호하며 키워준 은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의 스승이자 유년시절부터 어두운 길 환히 밝혀준 등대 같은 분들이기 때문이리라.(항간에 말하는, 낳은 정 보단 기른 정이 더 크다란 말에 우리가 대개 동의하는 이유도 이에 다름 아니다고 본다.)
어린 시절 일찍 부모님을 여읜 분들은 그 상실감과 허전함을 평생 갖고 간다고 한다. 하루도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다고 한다. 잊을 수도 없다고 한다. 밤에 꿈을 꾸면 꿈속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토록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부모의 사망이 (전문가들의 통계 수치라는 데) 후순위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자녀들이 장성한 성인의 경우라면 어쩌면 어렵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연의 섭리'(攝理)중 하나여서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해 봤다.(물론 부모님이, 또는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어떤 불행한 사고나 예기치 못한 병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경우는 예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는 또 다른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맞부딪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집 자녀들은 '어머니'를 더 그리워한다. 어머니는 세상을 갑자기 떠난 그 아버지 역할을 다하며 억척스럽게 힘들게 돈 벌러 나가고 가장이 되어야 하므로 집에 있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있어도 '어머니'의 부재(不在)를 더 느끼고 또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이별의 고통은 어디 이뿐이겠는가? 비단 가족과 친인척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 친구, 지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지난 과거에 관한 (이별과 상실의) 기억은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야 하며, 기억 속 이별이 준 (아직도 주고 있는) 큰 고통과 슬픔 또한 숨김없이 솔직히 표출될 때 우리는 치료제인 "약"과 같은 진정한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리라 본다.
개개인 각자가 행하는 위로를 주고받거나 큰 슬픔을 대하는 (받아들이는) 방식, 그 큰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 다른 과정 속에 각자의 삶을 대하는 인생관과 세계관(때로는 종교관까지도)이 형성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제 다시 이 글 서두의 첫 물음으로 돌아와, 우리는 아직도 계속해서 "세월이 약이다"라고만 하며, '회복탄력성' 운운하며 위로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아픔과 슬픔은 억누르고 묻어두고 감추며) 너무 세월이 흘러가고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애써 기다리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과거의 그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려 드러내고 노출하지 않은 채!
그래서 서두에 언급한 작가님은 공개적으로 쓰기 쉽지 않은 그 슬픈 개인사와 고통스러운 상실감을 (울면서) 글로 쓰며 스스로 조금이나마 치유가 되셨으면 좋겠다고 감히 바라본다.
그래서 어쩌면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고통, 큰 슬픔은 잊혀가는 (잊혀가길 바라는) 기억 속 "세월"이 약이 아니라 보다 더 드러내어 들여다보고 아직 아픈 부위를 어루만지며 글이든 대화든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면서 그 슬픈 감정이 아직 불러일으키는 울음에, 눈물 흘림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약'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다음 [어학사전],
PTSD :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심적 외상 후의 스트레스 장애)
억척스럽다 :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매우 모질고 끈덕진 데가 있다.
회복 탄력성(回復彈力性 resilience) : 실패나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원래의 안정된 심리적 상태를 되찾는 성질이나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