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에게 혹은 아직 아주 어린(?) 사람들에게 조차도 - 감정이라는 대상에 -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해 주려고 하는 시도 그 자체가 실은 얼마나 무모하기 짝이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심지어 오만불손(傲慢不遜)하게까지 비칠 수도 있음을 자각(自覺)하고자 짧은 글로 남겨둔다.
필자는 좋은 ‘감정의 싹’을 틔운다는 말을 좋아한다. 사회생활하면서 다정다감(多感多情)한 성품의 이웃사람들과 선의(善意)를 가지고 서로 함께 어울리며 선한 감정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공동체 속에 분명 기쁜 일이다. 그들이 선뜻 기대치 않은 어떤 양보와 배려 같은 호의(好意)까지 베푼다면 더더욱.
하지만 아무리 저마다 자신의 나이(세대) 또는 처지(여건과 형편)에 걸맞은 생각만 절실해지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하더라도 가끔 보면 어떤 편협한 지식과 일개 한 개인으로서의 경험치(經驗値)만으로 남[타인]을 (남의 싫고 좋음이라는 감정을) - 좋은 뜻이라며 - “계몽”(啓蒙)하겠다고 덤벼드는 무례함에는 실소(失笑)를 금치 못할 때가 종종 있다. 평소 말끝마다 사사건건 남을 가르치려 든다는 태도의 언행을 보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도 때로는 서로의 ‘빙산의 일각’만 보고 있을 뿐이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서로를, 특히 서로의 감정을 세세하게 속속들이 헤아리는 일은 매번 늘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바로 그 ‘감정’(우리의 그리고 타인의 감정)이라는 대상에게도 “뿌리”가 있다고 하니 그 나무의 땅 속 뿌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땅 위의 나무만을 보고 그 나무가 어떻다 저떻다 하는 것을 필자도 더욱 경계(警戒)하고자 한다.
어떤 상황에서 크게 화를 내며 대응하거나 오랜 시간 동안 어떤 분노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면 그 또한 연유가 있을 테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뿌리 깊은 (감정의) 골의 사실에 대한 이해 없이, 또는 천천히 하나씩 귀 기울여 듣거나 그 골을 메우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상대의 감정을 자신의 잣대로만 일방적으로 부정(否定)하는 행위는 결국 서로를 해치는 싸움을 초래하게 되고 말 것이다. 타인의 감정도 - 자기 자신의 감정이 그러하듯 - 저마다 그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다.(필자의 글이 다 맞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