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새해 1월이 되면 신문사별로 평소보다 특별히 좀 더 두툼한 조간신문 뭉치가 매대에 많이 꽂혀 있었다. 바로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비릿한 인쇄냄새 풀풀 풍기며 그 신문지 사이에 함께 지면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 신문을 사서 들고 - 필자의 이름을 찾았던 것은 아니고 - 신문지면에 발표된 그 시와 단편소설, 희곡 등 따끈따끈한 당선작품들을 하루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숨에 읽어냈다. 그때 그 당선작들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는 꼭 신춘문예에 응모하리라 다짐한 적도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글을 쓰던 필자의 친구는 신문사 신춘문예에 계속 도전하다가 나중에 서른 즈음 그 당시 유력 문학잡지를 통해 등단(登壇)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인생’을 걸고 평범한 일상을 희생하며 배고프게 글만 썼었고 마침내 작가의 꿈을 이루어냈다.
그때 그 당시 필자는 그의 당선작(소설)이 실린 문학잡지를 세상 기쁜 마음으로 받아 손에 펼쳐 들었지만 차마 그의 소설은 그 많은 여느 소설들처럼 줄줄 읽어내진 못했다. 한 단어 한 단어, 한 줄 한 줄 글을 쓰면서 그가 겪었을 그 고뇌를 짐작했기에, 아니 어쩌면 내가 직접 옆에서 그 과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흥미로운 플롯을 만들어내도 인물들의 시점(視點)에 세세히 공을 들였고 퇴고 전 작품 전체에 풍기는 문체(文體)에 괴로워했다.
우리는 한때 서로 습작한 글을 바꿔 읽으며 꼭 같이 등단작가(登壇作家)가 되자고 말했다. 필자는 먼 길을 돌고 돌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서야 다시 글을 써볼 요량으로 습작 중이다.
브런치스토리 글쓰기 플랫폼처럼 여기저기 인터넷 온라인상으로도 어떤 작품을 발표하거나 발행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필자는 브런치스토리에 작가로 “등단”했다) 여기서 끄적이는 필자의 글들을 우연히라도 그 친구가 보면 뭐라고 할까 갑자기 무척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뜨거운 열정과 간절함이 부족한 글을 쓰고 있다거나 뭔가를 쓰면서 감정의 절제 같은 ‘자기 검열’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술을 하면서 또 그런 예술작품(글)을 쓰면서 “배고프지 않으면”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없는 걸까?
위에 이 글 제목의 '감성도 늙는다'는 말은 어느 작가님이 필자의 글에 남겨주신 것인데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아직도 이탈리아 돌로미티 트레킹을 망설이거나 혼자 선뜻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따라 타지 못하는 것도, 혹은 먼 산만 바라보느라 커피가 다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마른 입술로 마저 못해 마시며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그에 대한 반증일까? 아니면 어떤 뒤늦은 자격지심(自激之心)에 스스로 “작가 인플레이션”을 심하게 앓고 있을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