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L 창작 시(詩) #105 by The Happy Letter
나도 한때는 푸릇푸릇하기만 했다.
한 줌 손에 잡힐 정도로 작았던 '모'였지만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큼 보기 좋다는
가문 논에 물 들어가는 것 같이 지켜보며
논두렁 따라 촘촘히 자라던 그 콩잎들과 함께 익어갔다.
따가운 여름 땡볕 가까스로 견디며
온갖 병충해(病蟲害) 다 이겨내고도
황금빛 물결 속에 무슨 죄지은 양 그저 고개 숙이며 살아왔다.
늦가을 알알이 맺힌 쌀 알갱이
남김없이 훌훌 다 털어내주고 나니
이젠 벌거벗은 듯 바짝 마른 볏짚으로만 남았지만
그래도 지금껏 식구들 따뜻한 밥 배불리 해 먹였으니
무슨 아쉬움이 또 남아 있겠냐마는,
나는 이제 날카로운 작두 끝에 잘게 잘려나가
소여물이 되어도 여한(餘恨)이 없지만
하늘이 나를 겨울 한 철 더 머물게 해 준다면
사과상자 속 탐스럽게 잘 익은 사과들끼리
서로 맞닿아 싸우다가 다치고 썩지 않게
잠시라도
그 사이사이 끼어넣는 그런 완충(緩衝) 볏짚으로 남고 싶다.
잠시라도
물 긷는 이들 그 머리 정수리에
무거운 물동이 받치는 '똬리'가 되어 주고 싶다.
그 물동이 머리에 이고 걷던 이들 시집 장가 다 가고 나면
그때는,
어느 추운 겨울날 구들목 따뜻하게 데워줄
부엌 아궁이 불쏘시개로 태워져
그저 하늘 위로 피어오르며 흩어지는
한 줄기 연기(煙氣)처럼 바람처럼
이 한 몸 기꺼이 하직(下直)할 수 있게 해 다오.
by The Happy Letter
모2 : 옮겨심기 위하여 기르는 어린 벼.
똬리 : 머리에 짐을 이고 나를 때 머리와 짐 사이에 얹는, 짚이나 헝겊으로 둥글게 틀어서 만든 고리 모양의 물건. 머리에 가해지는 충격을 완화하고 짐이 머리에서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다.
소여물 : 소에게 먹이기 위하여 잘게 썬 짚이나 마른풀.
불쏘시개 : 장작이나 숯불을 피울 때, 불을 쉽게 옮겨 붙이기 위하여 먼저 태우는 물건.(다음 [어학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