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음 씨는 사무실에서 평소와 같이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마무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책상이 약간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일본에 온지도 벌써 5년째고 한 달에 평균 두세 번 이런 일이 있지만 지진에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책상 위 컵이 살짝 좌우로 흔들리면서 물에 작은 동그라미가 생기는 것이 보였다. 내음 씨가 인상을 쓰는 게 보였던지 앞자리에 앉은 고바야시 상이 말을 건다.
" 심상, 내가 얘기했잖아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 무서운 건 물건들이 옆으로 흔들릴 때가 아니라 위아래로 흔들릴 때에요. 그럴 때는 정말 긴장해야 돼 하하. "
" 아 아무것도 아니네요. 보고서가 잘 안 써지네요 하하 "
내음 씨는 고바야시 상에게 억지로 웃어 보였다. 고바야시 상은 내가 지진이 올 때마다 아직도 인상을 쓰는 게 재밌었던 것 같다. 그네들에게는 일상이 되어버린 지진이지만 5년을 살았어도 내음 씨 같은 외국인에게는 아직도 지진은 낯설다.
" 심 과장님, 차 키 부탁하신 것 드릴게요. "
총무팀의 한국 사람인 현수 씨가 회사 차키를 가져다준다. 오늘 저녁때 공항에 출장자를 마중 가는데 조금 높은 사람이라 이번엔 내음 씨가 회사차를 가지고 직접 마중을 갈 참이다. 내음 씨는 보고서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현수 씨를 힐끗 보고 고맙다는 말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자동차 키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45분, 3시까지 보고서를 이메일로 보내야 하는데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아 내음 씨는 마읍이 조급해졌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약간 현기증이 온 것 같이 머리가 어지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TV와 휴대폰에서 지진 경고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 지진 알람은 아무리 빨라야 지진 5~8초 전에 울리는데 그럼 곧?'
이 생각을 하는 순간 뭔가 딱딱한 물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 띠띠띠띠띵띵띵띵 "
여러 군데에서 소리가 났다. 그중 가장 가까운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아까 물 동그라미를 그린 책상 위의 놓인 내음 씨의 컵이 있었다. 오늘은 두 번이나 지진이 오나 생각하면서 컵을 보는데 이번에는 움직임이 좀 이상했다. 분명 아까와는 다르게 컵이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소리도 점점 커졌다. 내음 씨 역시 옆에서 그 컵을 쳐다보는 고바야시 상과 눈이 마주쳤다. 여유 있게 웃으면서 내음 씨와 컵을 바라보던 고바야시 상도 내음 씨 컵이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소리도 점점 커지자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젠장 좌우 옆으로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분명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위아래.
" 이번엔 뭔가 다른 것 같은데... "
고바야시 상이 말하는 순간 뒤에서 꽃 그림 액자가 툭 하고 떨어지며 꽤 큰 소리를 냈다. 갑자기 부서장인 스즈키 상이 소리쳤다.
" 얼른 책상 밑으로 모두 들어가. 이번 건 큰 거야 ~!"
스즈키 상이 소리치자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은 당황하며 각자 자신의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지진이 나면 무언가 넘어지거나 벽/천장 등에서 떨어진 물건에 다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야외로 대피하는 것이 아니고 우선 진동이 있을 때는 책상 밑으로 대피하도록 되어 있다. 내음 씨는 일본에 와서 책상 밑으로 까지 대피한 적이 없어서 잠시 주춤하고 있는데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은 일본 직원들은 망설임 없이 책상 밑으로 대피를 했다. 내음 씨도 그제야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끼.. 끼... 기이잉 "
물건이 떨어지고 움직이는 소리 사이로 건물에서 육중한 철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본 건물들은 내진설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지진으로 진동이 발생하면 스프링처럼 꽤 큰 폭으로 원을 그리면서 돌게 되어 있다. 철골 소리는 건물이 돌면서 나는 소리였다. 책상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내음 씨에게 뒤쪽 벽에 있는 큰 창을 통해 옆 빌딩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일본 건물들이 간격이 좁게 지어져 있어 창문을 통해 옆 건물 사무실 사람들이 거의 1대 1 약간 못 미칠 비율 느낌으로 잘 보였던 터라 건너편 빌딩 창문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얼굴도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이상했다. 평소에 보던 건물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고 사람들도 훨씬 크게 보였다. 갑자기 왜 옆 건물 사람들이 그렇게 보였는지 깨달았다. 소름이 돋았다. 지진 때문에 내진설계로 건물들이 뱅뱅 돌기 시작하면서 옆 건물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 사람들이 더 크고 가깝게 잘 보였던 것이다. 정말 무서웠다. 몇 분동 안 무서운 여러 가지 소리와 땅이 움직이는 공포스러운 느낌이 계속되었다. 내음 씨는 머리가 하얘졌다. 여기서 죽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와 진동이 약간씩 줄어들고 있었다. 안심이 되어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지진은 줄어들고 있었다.
" 조금만 지금 그대로 책상 밑에 있어들. 진동이 멈추면 상황을 보고 모두 빌딩 밖으로 침착하게 대피하자고 "
스즈키 부장이 책상 밑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이도 가장 많고 당연히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 그 사람 말대로 해야겠다고 내음 씨는 생각했다. 다시 몇 분이 지났을까 진동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진동이 없어지고 얼마 동안 책상 밑에 그래도 앉아 있었다. 갑자기 스피커를 통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 여러분, 신바시 2 건물 방재센터에서 말씀드립니다. 지금 사무실에서 모두 나오셔서 1층 건물 밖으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계단을 이용하여 주시고 절대 엘리베이터는 이용하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
진동이 멈춘 틈을 타서 이제 건물 밖을 나와야 한다. 다음번 지진이 오기 전에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지진이 없을 수도 있지만 만약 더 강한 진동이 오는데 사무실에 그대로 있으면 위험할 수 있다. 다음번 지진은 아까 지진 이후 잦아드는 여진일 수도 있고 아까 진동이 전조여서 더 큰 지진이 올 수도 있다. 어떤 것일지는 신만이 아시리라.
내음 씨가 가방 하나만 챙겨 들고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여기저기 벽이 갈라져 벗겨진 페인트 사이로 틈이 보였다. 바닥은 떨어진 페인트 조각과 여러 가지 자재들로 어지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너무도 침착하게 줄을 맞추어 계단으로 내려오니까 아무리 무서워도 내음 씨도 거기에 속도를 맞추어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벌써 여기저기 다른 건물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려와 걱정스러운 듯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일단 추가 진동이 없어 2차 대피장소로 가지 않고 우선 건물 밖에서만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 여보세요, 안 들리세요, 여보세요, 전화가 안 되나 봐 "
갑자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휴대폰을 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맞다. 내음 씨는 갑자기 와이프와 애들 생각이 났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가족들에게 연락할 생각을 못했다. 내음 씨는 서둘러 전화기를 꺼내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뚜.. 뚜... 뚜 "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그제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왜 전화기를 들고 고개를 갸우뚱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말 심한 지진이 발생하면 무선 기지국이 손상을 입기도하고 또는 일본 정부에서 무선 통신이 몰려 긴급 연락을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개인 무선통신을 차단한다고 한다. 내음 씨는 와이프와 아이들에게 연락이 되지 않자 너무 당황스러웠다. 주변에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있는 일본 사람들에 비해 내음 씨는 확실히 외국인이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 아 맞다. 070 전화를 걸어보자. 인터넷 전화니까 될지도 몰라 '
내음 씨는 아침에 중고매매를 하려고 집에서 가지고 온 인터넷 전화가 생각났다. 원래 집에 인터넷 전화는 1대인데 지난주 한국출장에서 인터넷 업체를 바꾸고 신형 인터넷 전화를 무료로 받아 그걸 집에 놓고 구형 인터넷 전화는 중고장터에 팔려고 사무실로 가지고 왔었다.
" 딩동댕... 띠띠띠띠 "
연결 신호 자체가 들리지 않았던 휴대폰에 비해 인터넷 전화는 다행히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제발 받아야 하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별 일이 없어야 하는데.. 내음 씨는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떠올랐다.
"띠띠띠띠... 띠띠띠띠..."
신호는 계속 가는데 아직 아내가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재다이얼 버튼을 누르고 다시 한번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