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보고 타이밍의 미학

by 심내음

내음 씨가 해외 주재를 나가 2년 차를 맞은 어느 날 본사로부터 메일이 한통 왔다.

‘ CFO 지시로 해외 법인별 중장기 3개년 계획을 취합하고 있습니다. 첨부양식에 맞게 27일까지 회신 부탁드립니다.’

내음 씨는 안 그래도 써야 할 보고서가 싸여 있는데 추가된 또 하나의 보고서가 반갑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으니 보고서 초안을 잡고 작업을 시작했다. 며칠 후 주재원들끼리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CFO 중장기 보고서 얘기가 나왔다. 지난달 발령을 받고 부임한 정 차장이 나에게 물었다

“심 부장님, 중장기 보고서 다 하셨어요?”
“응 하고 있어.”
“심 부장, 뭘 그런 걸 시간을 끌어. 그냥 심플하게 핵심만 잡아서 빨리 끝내면 되지. 난 오늘 보냈어”

동갑인 주 부장이 자기는 끝내서 보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오늘은 19일이고 기한까지 8일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 부장은 보고서 내용이 부실하다고 질타를 받고 2번 정도 추가 작업을 하고 간신히 보고서 통과를 시켰다. 사실 주 부장의 보고서를 보면 처음 낸 보고서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주 부장은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실패했다. 회사의 최고 재무책임자인 CFO가 중장기 계획을 보고하라고 한건 파견을 나간 주재원이 근시안적으로만 사업을 보지 않고 중장기적인 계획을 위해 고민을 하고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보통의 보고서보다 긴 3주 가까운 시간을 준 것이다. 설사 1주일 만에 보고서를 끝냈다고 하더라도 이런 경우 기한 대비 너무 일찍 보고서를 보내면 주어진 사안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을 하지 않고 성의가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주 부장이 일주일 만에 끝낸 그 첫 번째 버전의 보고서를 기한 직전에 제출했다면 두 번이나 다시 수정하여 보고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보고서 제출기한 때문만으로 그렇게 두 번 수정을 한건 아니겠지만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특히 그 안에서도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고 해외 법인에 파견된 주재원들 사이에서 한 보고서가 내용만으로 다른 보고서를 압도할 정도로 뛰어나게 인정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내음 씨의 상사 중에 내음 씨가 존경하는 분이 있었다. 그분이 어느 날 이번 달 매출 차질에 대한 보고를 대표이사에게 보내는데 대표이사가 출장 중인 국가의 주재원 중 한 명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 상사는 전화로 대표이사가 공항 라운지에 들어가실 예상 시간을 확인하고 그에 맞추어 메일을 송부하였다. 상사는 내음 씨에게 대표이사께서 출장 중에 터프한 미팅이 많아 몸과 마음이 피곤하시다 들었는데 매출 차질 같은 좋지 않은 뉴스에 대한 보고서를 정신없이 이동 중에 읽으시는 것보다 라운지에서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하고 나서 보고서를 읽으시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그 상사분은 덧붙이길 단순히 그분의 좋은 기분을 틈타 혼나지 않기 위함이 아니고 본인이 매출 차질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꼼꼼히 정리하여 보고하였는데 불필요하게 대표이사가 매출 차질이라는 안 좋은 뉴스 때문에 다른 분석과 대책 부분을 놓치지 않으시도록 그나마 가장 나은 타이밍을 찾아 메일을 보낸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보고 받는 사람의 위치와 현재 상태까지도 파악해야 하는 것이 보고라는 말이다.

회사생활은 단편적이지 않고 입체적이고 다이내믹한 것 같다. 훌륭한 보고서는 내용뿐 아니라 보고하는 타이밍까지 신경을 써야 완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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