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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Nov 18. 2016

2. 연애

진하게 연애 한 번(한번) 해 본 여자

 도서관에는 웬일!

 우리 과 아이들이 난리가 났다. 내가 떡하니 도서관에 자리 잡고 안 나타나기 때문이다. 써클 (80년대는 동아리를 이렇게 불렀어요) 남자 아이들도 멀고 먼 사대 건물로 나를 찾아와서는 히죽거리며 내 얼굴 표정을 살피고 뭔가 이야기를 들으려고 앉아 있었다.

 이제 막 대학 1학년을 보내고 2학년을 맞이하는 계절에 있는 우리는 도서관하고는 안 어울렸다. 지긋한 고3을 보내고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 속에 푹 빠져 1년 동안 우리는 참 재미지게 살았다.

 우리 때보다 몇 십 배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도, 불안한 미래두려운 요즘 젊은이에게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사실 사립 사대를 다니던 나의 미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도 아무튼 일단은 잘 놀았다.

 시국은 불안했고, 넥타이 부대까지 나서서 전 국민의 열망이 이루어진 뜻깊은 해이기도 했지만, 우리 학번은 80년대 학생 민주화의 끄트머리 막내 격으로 지랄탄에 눈물 흘리며 분개했지만, 부끄럽게도 사실 나는 선배들의 따라쟁이 중의 1인 이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좀 더 공부해야했고, 좀 더 잘 알았어야했다. 무지하고, 무식했던 부끄러운 대학교 첫 해였다.

 복학생 선배도 아닌데 도서관에 자리 잡고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 나와 어울려 다니던 아이들한테는 상당히 낯선, 이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나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계절에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짝사랑

 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1년 동안 수많은 짝사랑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일주일, 한 달, 심지어 하루 꼴로도 짝사랑의 대상이 바뀌며 때 늦은 애정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은 빗나갔다. 물론 나에게도 다가오는 사랑들도 있었으나 그것 역시 내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 한 상대편의 짝사랑으로 끝나버려 제대로 성사된 사랑은 없었다.


오글
거리지만
그래도 탑건

 내가 도서관에 자리 잡은 이유는 딱 한 가지, 탑건 때문이었다. 톰 크르주와의 외모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이름에 비슷한 발음의 ''자가 들어 간다는 이유만으로 친구에 의해  '탑건' 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리게 된 동아리 선배 때문이었다. 그 해 이 영화가 그 OST함께 엄청난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일종의 패러디 호칭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주 귀여운 어린 남자 아이가 예쁜 미소를 짓는 꿈을 꾸었다. 너무 아이가 귀엽고, 미소가 예뻐서 꿈을 꾸면서도 기분이 상당히 좋았었는데, 그러고 학교 동아리 방에 갔는데, 그 미소와 비슷하게 웃고 있는 선배를 본 것이다. 그 때부터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어진 나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

 우선 복학생 선배가 자리 잡은 5층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선배의 동선을 살피며, 복도에서, 휴게실에서 계단에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연출하기 위해, 손에는 델몬트 주스를 하나 들고 발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 형, 안녕하세요?
이거 드실래요?
어머, 점심 드시러 가세요?

 선배의 반응은 늘 부족하고 어정쩡했지만 나의 짝사랑은 수개월 동안 무르익어 갔다. 사랑에 푹 빠져 내 마음껏 아쉬움 없이 사랑한 그 시간들은 정말 행복했고, 늘 웃을 수 있었다. 콩깍지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나를 사랑의 테두리 밖으로 절대 나가지 못 하도록 꽁꽁 싸매었다. 늘 도서관에서 선배 주변을 맴돌았으며, 여러 가지 기회와 자리를 마련하여 함께 있는 시간들을 확보해 나갔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을 만큼 내 사랑은 커져만 갔다. 자존심은  사실 나중 문제이다.

도서관 입구 매점에서 매일 사들고 손에 주었던 마실 것들
콩깍지는 이미 씌어져

 사랑을 해 본 사람들은 안다. 사실은 사랑이 자존심보다 훨씬 더 커서 사랑을 먼저 챙기게 된다는 것을, 자존심을 챙길 여력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항상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2호선 라인에 자리 잡은 학교를 나는 인천행, 선배는 수원행을 타고 통학하고 있어서, 우리는 항상 신도림역에서 만나거나 헤어졌었다. 더운 날은 더운 대로, 추운 날은 또 추운 대로, 1호선 신도림역에서 몇 대의 전철을 보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눈빛을 주고받기도 했으나……. 그 뿐이었다.

수많은 추억의 '신도림역'
울림 없는 짝사랑

  몇 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나의 짝사랑도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나 좋다는 아이들도 많은데, 굳이 나를 챙기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 사람에게 언제까지 사랑을 얻으려 노력해야 한단 말인가? 힘들었다. 사랑을 여한 없이 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아쉬움도 없는 것 같았다. 지쳐버린 나는 힘들지만 사랑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런 울림 없는 힘든 사랑을 접기로 했다.

 사실 특별한 관계도 아니니 정리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냥 내 마음만 멈추면 되는 관계였다. 자리 잡은 도서관만 떠나면 될 정도로 이별공식은 간단했다. 내려오는 도서관 계단마다 사랑의 아픔이 찍혀져 가슴이 저려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을 나 혼자 할 수는 없으니…….


 상처 입은 내 사랑

 습관이 무섭다고 오로지 선배 때문에 자리 잡은 도서관 생활이었지만, 어느덧 나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 생활은 계속 이어졌으나 선배와의 만남을 줄이고, 되도록 같은 공간에 있지 않도록 내 나름의 이별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마음은 찢어졌으나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드디어 응답이

 그러던 어느날 신도림 역에서 선배를 만났다. 사뭇 다른 표정의 선배는 할 말이 있으니 역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거절해야한다' 라는 생각을 먼저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이끌고 신도림역 밖으로 나갔으나 그 당시 신도림 주변은 온갖 회색으로만 뒤덮인 황량한 곳이어서, 마땅히 들어갈 커피숍도 없었다. 그것도 만우절 날, 모든 것이 어색하고, 황량하고, 어설픈 분위기에서 요즘 말로 말하면 사귀자는 뜻을 선배가 이야기 한 것 같다.

 그 당시의 나는 어리석게도 ‘사귀다’의 개념을 알지 못 했다. 오로지 사랑을 해야만 만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사랑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인지, 너무 무겁게 본 것인지 아무튼 그랬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의 외로운 사랑은 계속 되었다. 억지로 특별한 관계가 되었지만, 계속 나는 허하고 외로웠다. 같이 있어 좋았지만, 때때로 내 마음을 뻥 뚫리게 하며 휑하게 하는 사랑을 하게 했다.

영등포역 첫 만남의 커피숍 이름이 아마 '촛불'
물 오른 미모 ㅎㅎ

 시간이 흘러 나는 3학년이 되었고 우리는 여전히 만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찾아온 변화는 나의 미모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화장기 없이 선머슴 애 같기만 하던 나는 어느덧 화장을 하기 시작했고, 청춘의 한 가운데서 맘껏 젊음을 뽐내기 시작했다. 곧 나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우리의 관계는 역전했다. 나날이 물오른 미모를 경신하는 나는 자신감이 따라서 높아졌고, 선배를 때에 따라 콩깍지 벗겨진 눈으로도 볼 줄 알게 되었다. 이제 슬슬 제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우습게, 하찮게 여기는 경지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한 없이 사랑했던 경험이 나를 원 없이 만들어 더 이상 거칠게 없었다. 남김없이 사랑한 자의 여유로움을 이제야 만끽할 수 있었다.

 전세는 역전

 내가 졸업반이 되었을 때 그 선배는 이미 취직이 되어 지방근무를 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지자, 마음도 멀어지고 그러자 나에게 선배란 존재도 시큰둥해졌다. 4학년 교생실습 나가던 기간에 우리는 거의 헤어질 뻔 했다. 매달리는 쪽은 당연히 선배였다. 그리고도 아주 오랫동안 나는 예전에 내가 당했던 외로움과 쓸쓸함과 힘겨움을 톡톡히 선배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선배는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나의 모든 것을 참아내야만 했고, 견뎌내야만 했다. 이제는 내가 덜 사랑하는 이가 되어서 선배를 완전히 이겨버린 것이다. 22살에 시작한 나의 첫 연애는 그렇게 영광스럽고 자랑스런 사랑이 되어 나의 가슴 한 가운데에 폭 하니 자리 잡았다.

 서로에게 한 번씩 가슴 바닥까지 가본 실연의 경험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 고통과 기쁨을 한 번씩 느껴 봤기에 더 소중히 우리 사랑을 키울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는 만났다.

  데이트 비용이 부족해서 하루 내내 걷기만 할 때도 있었고, 첫 월급으로 가장 큰 선물로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하면서, 학교 곳곳마다 우리의 추억을 심어 놓으며 캠퍼스 커플로 이름 지어 사랑으로 충만한 시간들을 보냈다.

  보잘 것 없는 우리 둘이었으나, 서로에게는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 20대를 버텨주었다. 절망에 빠졌을 때, 돈이 없어 가난했을 때, 지쳤을 때, 외톨이가 되었을 때, 오해를 받았을 때, 좌절했을 때……. 우리는 늘 함께 했기에 난 언제나 사랑으로 마음만은 부자인 연애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7년 동안 쉬지 않고 한 남자와  딱 한 번 연애해 본 나는 순진한 사랑의 숙맥일까? 아님 사랑에 능숙한 연애의  달인일까?


( 모든 이미지 출처는 다음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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